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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Feb 07. 2023

[리뷰]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살아 움직이는 네온 사인의 진흙 세계

게임 [사이버펑크 2077]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게임 [사이버펑크 2077]이 신박하고 매력적인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오픈월드로 구현했다며 한창 모두의 기대를 끌어올리던 시기, 나도 게임이 출시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SF 소재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중 아포칼립스나 디스토피아와 같이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속이 문드러진 암울한 세계를 더욱 좋아하기 때문이다. 온갖 고삐 풀린 상상력이 세밀하게 구현된 2077년의 사이버 세계를 게이머가 무한정 탐험할 수 있다니. 한때 게임 [소울워커]의 시작 도시에서 하늘을 잠식한 큰 블랙홀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처럼, 사이버펑크 세계 속에서 내가 막연히 상상만 하던 근미래를 눈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게임 출시일이 임박해질수록 가슴이 떨려왔다. 그런데 웬걸,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출시된 게임은 그간의 광고와는 전혀 달랐다. 그렇게나 강조했던 자유도와 개성이 거짓인 것으로 판명이 나고 온갖 버그가 입소문을 타고 퍼지며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진짜 미래 세계를 무대로 한 오픈월드 게임이 나와주겠지, 하는 기대를 한 번 더 미뤄두어야 했다.


  [사이버펑크 2077]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이 나왔다는 건 게임을 잊고 산 지 한참 뒤였다. 그땐 넷플릭스를 해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하나로 그렇게 처참히 망했던 게임이 다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는데, 최근에 가족 넷플릭스를 결제하며 넷플릭스를 최대한으로 뽑아먹으려 이것저것 살펴보다 보니 기억 속에 묻어둔 소문이 떠올랐다. 얼마나 잘 만들었길래 욕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고 게임의 새로운 행보를 응원하고 있을까? 마침 새해를 맞이해서 헬스장도 새로 끊었는데 러닝머신을 뛰는 동안 볼 만한 게 없었다. 그렇게 아다리가 딱 맞아서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1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늦은 밤까지 남은 에피소드를 전부 끝냈다.




  내가 사이버펑크 세계관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각해진 미래 세계의 현실이 오히려 화려한 네온사인과 증강현실 환상 등의 화면으로 그려진다는 점. 누구보다도 발전한 세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현재에서부터 놓친 것들이 곪아들어가고 있다는 대비가 너무 좋다. 보이는 것처럼 마냥 놀이동산 같은 세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놓친 것으로 지목되는 것들은 '사랑', '도덕' 등의, 현대 사회에서도 결핍되어 가는 개념들이다. 이렇게 보면 사이버펑크 세계관은 전부 비슷비슷할 것 같다. 사람들은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 효율만을 중시하며 다양한 감정을 경시하며 살아가고, 인간의 한계를 한참 뛰어넘은 기술을 가지고 기계 인간의 범주에 도전하는 그런 그림들. 그럼에도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에서 등장하는 2075년의 미래는 기존 작품들보다도 더 신박하고 꼼꼼해서 마음에 들었다.


  증강인간 혹은 사이보그는 사이버펑크 장르에서 무척 흔한 소재다. 하지만 2077 세계에서 몸에 이식하는 기계, 즉 크롬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아 '사이버사이코'가 된다는 설정이 무척 참신했다. '인간이 몸의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한다면 과연 그는 여전히 인간일까'란 질문은 많은 사람들이 토론하기 좋아하는 내용이지만, '그가 인간이건 기계이건 간에 기계와 결합한 그의 정신세계는 어떻게 되는가'란 질문은 생소하다. 그런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사회적 문제인 '사이버사이코'로 표현했다는 게 마음에 든다.


  그런 큼직한 개념 말고도 2077년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세밀하게 쌓여 있어 좋았다. 막연히 미래 세계를 그려낼 수는 있어도, 그 세계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아주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서 작업해야 한다. 미래에서 쓰이는 용어나 장치, 그리고 현대에서 사라지지 않고 변형되었을 것들, 혹은 변하지 않은 것들. 완성된 완전몰입 가상현실 같은 브레인댄스(BD) 시스템이나 전자동 시스템을 통해 관리되는 주택 등의 설정을 마주할 때마다 저 세계가 어디에선가는 존재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아카데미 수업에 얽힌 데이비드의 말썽 - 하드 및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지 못해 사이버 공간에서 진행되는 수업을 망가뜨린 것 - 에피소드는 무척 재미있다.


  스토리 면에서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특히 주연 캐릭터인 데이비드의 성장과 끝이 그렇다. 개인적으로 난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은 현실성이 없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여운이 길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데이비드와 루시의 행복한 미래를 바라면서도, 그 끝이 비극이리란 걸 깨달았을 때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다. 팔코가 죽었을 때 곧 다른 러너들도 하나둘 죽게 되리란 걸 알아챘고, 데이비드와 루시가 각자의 사정에 집착하며 소통을 전혀 하지 않을 때 올 게 왔다는 심정뿐이었다. 그들이 죽음이 슬펐을지언정 의아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이 데이비드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뿐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데이비드는 시작선부터가 불리했다는 것도 환상보다는 현실에 초점을 둔 것 같아 괜찮았다. 애초에 나이트시티라는 배경은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 하는 엔딩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연출에서 나온다. 얼마든지 서정적으로 갈 수 있는 장면을, 얼마든지 이야기 흐름에 집중하는 연출을 넣을 수 있는 장면을, 여성의 몸을 물화하느라 놓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런 장면이 나올 때면 나는 매번 몰입이 깨졌다. 사람의 몸은 보는 시선이 왜곡되었을 뿐 그 자체로 야한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에 백번 동의한다. 따라서 서사 진행에 꼭 필요하다거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그린 알몸 장면 - 데이비드와 루시의 가까운 사이를 보여주는 장면 등 - 에서는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장면이 여전히 너무 많다. 그럴 때면 이 작품은 나와 같은 사람들을 소비자로 염두에 두기는 했을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2075년이라는 앞선 미래를 그린 작품이지만 시선은 현재에 멈추어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러닝 타임도 조금 아쉽다. 빠른 템포와 깔끔한 결말을 칭찬하는 사람이 많던데, 개인적으로는 1부와 2부로 나눠 데이비드의 성장과 몰락을 좀 더 느리게 끌고 갔으면 한다. 그 많던 엣지러너 단원들을 10화 만에 전부 죽이느라 뜬금없이 간 캐릭터도 있고, 데이비드와 루시의 갈등이 너무 압축된 느낌도 있다. 데이비드가 사이버사이코가 되어가는 장면은 안타까웠지만 여러 화에 걸쳐 조금씩 낌새를 보이고 그에 대한 주인공의 내면 묘사가 더 이루어졌다면, 지금보다도 더 깊은 여운이 남지 않았을까 싶다. 잘 만든 세계관과 스토리가 너무 빨리 끝나 아쉽다.




  요즘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추세인가 보다. 게임 [리그오브레전드]의 세계관과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아케인]이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에 앞서 엄청난 흥행을 거두고 2023년 올해 시즌 2가 나올 예정이다. 이전에도 [리그오브레전드]나 [오버워치] 등에서 게임 내 세계관을 흥미롭게 풀어내는 짧은 시네마틱 영상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이제 격적으로 흐름이 긴 영상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 같다. 게임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시리즈물과 원작 게임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이런 선순환이 쭈욱 이어졌으면 한다. 다음 애니메이션 소식은 [오버워치]에서 들려오지 않을까 살짝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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