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삼봉 일출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쳐 있는 광활한 파타고니아 국립공원은 여유로운 트레킹으로도 인기가 많지만, 그중 '삼봉'이라 불리는 토레스 델 파이네만 보기 위해 가는 사람도 많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돌산을 오르고 올라 볼 수 있는 세 개의 봉우리와 그 아래의 거대한 호수가 아름다운데, 날이 좋고 구름이 없으면 해가 뜰 즈음 삼봉이 붉게 물드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새벽부터 일어나 삼봉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삼봉은 O 트레킹 일정의 마지막이었다. 트레킹을 계속할수록 피로가 누적되어 힘들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걸으면 걸을수록 활력이 생겨 몸이 점차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온몸을 쑤셔대는 근육통과 부풀어 오른 말단 이곳저곳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상쾌한 공기와 멋있는 풍경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의 산장은 트레킹 일정 중 가장 비싼 칠레노 산장이었다. 도미토리식 베드 하나에 무려 한화로 16만 원 정도였던 그곳은 일정에 맞는 남은 숙소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고른 곳이었지만, 알고 보니 삼봉 일출을 보기 위해 최적인 곳이라 인기가 많은 산장이었다.
삼봉을 보기 위해서는 국립공원 초입에 위치한 센트로에서 출발하거나 센트로와 삼봉의 중간쯤에 위치한 칠레노 산장에서 출발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지만 칠레노로 향하는 길은 끝없이 가파른 오르막에, 엄청난 바람에 몸이 흔들리는 좁고 높은 계곡마저 지나야 한다. 겨우겨우 칠레노 입구에 도착해 우리가 생각했던 건, '센트로 캠핑장에 숙소를 잡았더라면 삼봉 일출을 보러 올 수 없었겠다.'는 아찔한 감상이었다.
지금껏 저렴한 캠핑장만을 지나왔던 우리는 산장 내부의 아늑하고 깔끔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 칠레노 산장을 보았더라면 평범하디 평범한 도미토리라 생각했을 텐데, 지나온 길이 고되었다 보니 이마저도 5성급 호텔로 보였다. 차갑고 축축한 바닥이 아닌 따뜻한 원목 바닥에, 딱딱하고 얇은 매트가 아닌 푹신하고 두꺼운 이불까지. 그동안 고생한 걸 이곳에서 보상받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삼봉 일출을 보려면 새벽같이 나가야 하기에, 이 따뜻한 곳에서 오래 빈둥거리지 못한다는 게 원통했다.
산장의 데스크에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날씨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그래프와 표도 있었다. 앞서 엘 찰튼의 피츠로이가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쉬웠던 나는 불타는 삼봉이라도 보고 싶은 간절한 상태였다. 다행히 데스크 직원은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 강수 확률 등이 복잡하게 그려진 차트를 유심히 보다 환한 얼굴로 내일의 날씨는 아주 좋을 거라고 대답했다. 혹시 몰라 여러 번 되물었는데, 똑같은 답이 돌아오자 안심이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야간 산행을 감행할 용기와 무모함이었다.
칠레노에서 삼봉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넉넉잡아 두세 시간 정도로 계산했다. 그날의 일출 예정 시간은 5시 반이었다. 내 체력이 어디까지 받쳐줄지, 삼봉 등산 난이도가 어느 정도일지 몰라 우리는 조금 이른 새벽 2시 반쯤에 출발했다. 알람에 맞춰 일어나 간단히 세수를 하고 스틱과 먹을 것을 챙겨 산장을 나섰다. 다행히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이 깨어 등산을 준비하고 있었고, 바로 앞에는 헤드랜턴을 갖춘 노련한 외국인 친구가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핸드폰 손전등만이 가지고 있는 빛의 전부였던 우리는 헤드랜턴이 주는 넉넉한 시야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발을 놀렸다.
핸드폰이 쏘아내는 불빛은 생각보다 든든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숲의 풍경도, 걷다 보니 점차 눈에 익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 보니, 앞서 출발해 저 위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사람들의 손전등 불빛이 꼭 도깨비불처럼 일렁이는 게 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장 초입에서도 불빛이 점점이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힘이 났다. 내 핸드폰에서 나오는 불빛도 저 아래 사람들에게 보일까 생각하니 즐거웠다.
삼봉 등산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길이 평탄하지가 않고 끝없이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 데다, 정상에 오르기 전 돌덩어리들로만 이루어진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고비가 여러 차례 있다. 중간중간 계곡에서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지 않았더라면 지쳐 나가떨어졌을 수도 있다. 해가 뜨고 하산하면서 우리가 올라온 길을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몰랐기에 덜 힘들게 올라올 수 있었겠다 생각할 만큼 제정신이 아닌 길이 많았다. 일출이 오기 전 삼봉에 무사히 오를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구름이 많아 붉은 장관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처음 해 본 야간 산행이 주는 뿌듯함만으로도 벅차서 큰 미련은 없었다.
미약한 손전등 불빛 하나만으로는 우리가 걷는 길을 환히 밝힐 수는 없었다. 초행길을 지나는 중인 데다 절벽을 옆에 두고 걷는다는 생각을 하니, 서로를 놓치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나무 사이로 끝없이 솟은 하늘을 보는데,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별들이 점점이 찍혀 반짝이는 게 보였다. 별빛이 어스름히 비추던 길이 끝나고 나니 사람들의 불빛이 뒤를 이어 산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안심이 되었다.
걱정과 함께 시작한 야간 산행이었지만, 이 길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니 불안이 가셨다.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고 함께 걸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시간,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경쟁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는 순수한 도전과 집중의 가치가 소중하게 다가온 시간. 그날 삼봉의 머리께에는 구름이 끼어 완벽한 풍경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했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