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보통의 날들
20대 후반 시절 짧게 만난 소개팅남이 있었다. 이름도 생긴 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간 소개팅 나왔던 사람 중 꽤 멀쩡하게 생겼다는 느낌만 기억난다. ‘나의 소개팅에 이렇게 멀쩡하신 분이!’ 하고 들여 본 그의 카톡 프로필엔 ’ 좋은 습관’이라고 되어있었다. ‘좋은’과 ‘습관’이라는 친숙하고 일반적인 단어가 합쳐진 조합으로 감성 같은 건 신경 쓰지 않 을듯한 직업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더 만날 일도 없었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 가까웠지만 ‘ 좋은 습관’이라는 단어 자체는 그렇게 나랑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우리는 매 순간을 계획할 수 없기에 별수 없이 흐르듯이 살아가지는데 산다는 것은 쌓여가는 것이었다. 매 순간의 결정과 경험, 배움과 행동이 쌓여 한 시간 전과 지금의 나, 오늘과 내일의 내가 되는 일. 이다지도 당연한 부분이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십대 이십대에는 그냥 무심코 스쳐지내버린 나의 생활들. 그것을 시간의 흐름에 넉넉한 마음을 지닌 청춘이었다 부를 수 있었겠지만, 서른셋 쯤부터는 좋은 습관이라는 '반듯하고 기분 좋은 틀' 안에서 지내고 싶었다.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배어 있는 습관이 나의 태도와 시간과 하루를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날 그것을 알게되었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사람이 내게는 그다지 좋은사람은 아니었기에 이제와 ‘알고보니 그 사람은 건설적인 사람이었겠어. 어쩌면 꽤 괜찮았겠는데.’하고 함부로 허락해주진 않을 거지만 나에게 ’좋은 습관’의 단어를 꼼꼼히 읽게 해 준 스쳐가는 누군가였다.
직장인의 하루에는 함께하는 공용의 큼직한 맥락들이 있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함께 공유하고 있기에 나의 오전과 오후의 쓰임새는 정해져 있다.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는 성인이 되어 회사에서 이어간다. 그런데 프리랜서나 자영업자 또는 취업준비생이 되는 순간 우리의 하루를 컨트롤해주는 것은 엄마의 잔소리, 나, 습관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그중 가장 건설적이고 지속력이 강한 건 나 자신과 습관인데 경험으로는 나 보다 습관이 더 믿음직하다. 회사의 틀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갖게 되면서 생활습관보다 더어려웠던 것은 마음습관이었다. 마음 습관은 행동을 선택하는것보다 더 빠르게 생각해버린다. 어떤 흐름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만큼 빨라서 이미 부정의 마음을 입밖에 내뱉고 나서 '아차' 하고 생각을 되짚어간다.
자영업일의 특성인 '자율성'과 '엄마'라는 새로운 역할이 만나 총체적 난국이 펼쳐지는 기간도 있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 자영업자의 최고 장점인 줄 알았던 자율성은 이토록 무서운 녀석이었다. 하루와 일주일, 한 달의 일정에서 자신을 컨트롤하기는 물론이고 더 어려웠던 것은 마음 회복의 탄력성을 지니는 일이었다. 직장인의 나는 퇴근이 있었는데 사장인 나는 머릿속에 퇴근 스위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마음의 탄력을 회복할 시간이 없었다. 유난히 배려 없는 CS고객 을 만나면 나는 상처받았다. 상처받았다는 것이 프로답지 않아 보여 자존심이 상해 마음을 외면했다가 다시 들여다보면 역시나 그건 상처였다. 금요일 저녁에 들은 대사들은 주말까지도 나를 따라다녔다.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할까. 왜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 맴돌았고 나의 주말을 그 사람에게 소비하고 있었다. 내 마음이 아까웠다. 더 지체할 수 없어 심리 상담소를 찾아갔다. 올해 4월이었고 글을 쓰는 지금은 창밖에 눈 내리는 11월 말. 마음의 치료 효과는 느림보라 나에게 의문을 품을 때도 있지만 4월과 11월의 나를 비교해보니 조금씩 마음 회복의 탄력이 붙어온 듯하다.
그동안 찾아낸 나의 마음 습관의 긍정 스위치는 ‘기대와 설렘’이다. 워킹맘의 나는 요즘 내 인생에 대한 작은 기대에도 막연할 수가 없었다. 막연함은 충족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고 흐릿하여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실현과 가까운 것을 기대하기로 했다.
아기와 삶을 살다 보면 가장 힘든 것은 아기에게 나의 일정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아기가 어린이집에서 자는 시간은 12시쯤인데 집에 있는 주말에는 자지 않으려 하 니 2시 30분은 되야 잠이 든다. 도서관에 가서 글쓰기 자료를 수집하고 싶다면 그에 맞춰 1시가 출발시간이 된다. 이 친구의 생체리듬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잠이 든 아기를 둘 러업고 돌아와야 한다. 그럴 때는 이불에 뉘어 마스크와 옷가지를 살살 벗기며 잠이 달아나지 않기를 어느 때보다 절실히 바란다.
이런 삶을 사는 지금의 내가, 인생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한다면 아마 이런것이겠지. 혼자 집의 소파에 누어 뒹굴뒹굴하며 티브이를 보고 활동적이지 않은 나태함으로 청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 갑자기 만나도 마음의 무게감이나 거리낌 없는 이들과 삼겹살에 소주도 마시고 한참 붉어진 볼에 차가운 손을 갖다 대며 인생이 쓰다 좋다 하는 것, 여행지에서 매일 수영과 책을 읽고 끄 적이고 걷고 먹는 것. 나의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이미 내가 다 겪어 온 과거의 나에 게서 온 것들이었지만 지금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전처럼 여유와 나른한 일상의 기쁨은 나를 충족해줄 수가 없다.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부터도. 집 가까이 생겨 좋아했던 스타벅스에 혼자 넋 놓으러 가려면 아기를 맡아줄 어른 한 명 필요하다. 이전의 일상처럼 특별한 모임 약속이나 여행을 누리려면 미리 폰 알람에 일정 체크를 해두고 누군가의 허락이(동의) 필요하다. 그 날을 위해 예쁜 손톱이나 옷을 하나 사려 한다면 깜깜해진 고요한 밤을 틈다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마저도 안될 때가 많은데 그건 내가 아기를 재우다 잠들어버리고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기 때문이었 다. 나보다 젊은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있는 것들을 SNS로 보게되면 나는 시장에서 엄마들이 종종 쉽게 사오는 화분이 된것 같았다. 꽃을 피우지도 않아 시선을 빼앗을 때도 없고 이 화분을 위한 토분 같은 건 애초에 없기에 집에 있던 커다란 토분에 심겨져 애석하기도 한, 엄마의 귀여움을 받아 간택 당해 데려온 화분인데도 그저 그렇게 보였던 화분처럼 나를 특별하지 않게 취급했다.
겨우 하루를 보내고 아이를 재운뒤 널부러진 옷가지처럼 쇼파에 늘어졌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현 가능한 기대 같은 것으로 나를 다시 심폐소생술하고 싶다. 아 지금 나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막연한 작은 기대가 아니라, 막연하지 않은 실행 가능한 계획적인 기대를 품게 된 것은 어쩌면 나의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내가 새로 짠 기대 방식은 크게 두 가지 노선이 있었다.
A 현재에 속해있는 나에게서 기대하기. - 관점 전환 필요
B 날마다 쌓아서 1년, 3년, 5년 10년 후를 기대하기 - 존버 필요
A는 이런 것이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에서 기대를 품자!’ 그건 매일 붙어있는 가족이었고 그것이 지금 나의 환경의 본질이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하던 기쁨의 것들을 이젠 가족과 함께 해볼 수 밖에 없었다. 이전의 즐거움이 없다는 아쉬움보다는 그 와중에 해내가야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계절 즐기기, 새로운 곳 가기, 익숙한 것을 새롭게 이야기해보거나 경험하기’ 같은 것. 감사하게도 아기의 존재는 처음 하는 것이 많고 매우 순수해서 내가 무언가의 흥미로운 물질을 갖다주거나 즐거운 상황 안에 두면 나 혼자 했을 때보다 몇 배 더 행복하게 해준다. 두 살에 만든 트리 만들기 돕기와 세 살의 만드는 트리 만들기는 엄연히 다르다. 덕분에 서른 일곱 살에 만드는 트리도 새롭다. 작년에는 온전해 보이지 못 한 발걸음을 제법 빨리하며 다가와 트리 전구의 반짝임을 침을 줄줄 흘리며 보고 있는 아기를 보고 한참을 웃었다. 올해에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반짝반짝해요’하며 산타 할아버지에게 자동차 선물을 기도하는 아기가 있다. 나는 이 아이 덕분에 앞으로의 트리 꾸미기 또한 매해마다 새롭게 행복할 것이다.
B는 되도록 일을 제외한 '되고 싶은 것'으로 초점을 맞추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일을 배제한 5,10년 후의 나를 기대하는 것이 더 어려웠기에 굳이 분리하지 않고 나라는 사람 자체의 삶의 방향들을 적어보았다. 무엇보다 꾸준함과 진정성이 관건으로 떠올랐다. 이건 매일 무언가를 하는 존버정신이 필요했는데 진정성이 없다면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브런치의 글도 블로그도 독서도 새벽 기상도 매일의 기도도 취향 유지와 공부하기도, 당연히 못하는 날들이 무수히 많았지만 아주 적은 걸음이라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미세하게 실현하고 있음에 가까웠다. '기대하는 기쁨을 지닌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에는 '나는 어떻게 살고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매번 뒤따랐다. 오년 뒤에도 입고 싶을 기본이 탄탄하고 질이 좋은 옷으로 단촐하게 드레스룸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클래식한 취향을 가진 나로 머물 수 있었고 스타일링 고민을 줄일 수 있었다. 오래 간직할 가구를 고르는 일도 소비 이상의 현재를 누리는 삶의 방법 중 하나였다. 다이어트보다 시급해진 체력증진을 위한 운동은 더욱 매일의 지속성을 필요로 했다.
오늘 ‘무엇’을 했기에 기대라는 것이 따라왔다. 차선이 아닌 나름 현재에서의 최선의 선택들로 채워진 오년 후의 나의 마인드와 분위기는 어떠할까, 나의 공간과 일의 모양새, 삶의 방향성 그렇게 나는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그것들은 당장에는 막연하지만, 막연하지 않게 매일을 실행하고 기대하면서.
기대하지 않는 삶은 몹시 퍽퍽하다. 퍽퍽해서 넘어가지질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다들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은 꿈 같은 것도 하나쯤을 가지고 살면 좋겠다.
이뤄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중요하지 않은 꿈이면 좋겠다.
무리하지도 않고 급한 마음 하나 없이 아주 천천히 오늘의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그저 꾸준히 관심과 눈길을 주고 언젠가의 그 날을 위해 미약한 걸음 정도로만,
나의 끝판대장인 그 꿈을 잊지 않는 정도로만.
처음 고백하는 것인데 나의 이뤄지지 않아도 되는 꿈은 드라마 작가다. (무척 부끄럽다)
이뤄지면 좋고 안 이뤄져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