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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아 Apr 06. 2022

남들과 나의 틈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보통의 날들

코로나로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고 싶은 마음을 포스터로 만들어 구매고객에게 보내주었던 포스터 .나라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통하고 싶다   


남들보다 내가 조금 더 잘하는 것


이제는 잘한다 부족하다는 기준을 모르겠다. 그저 남들과 다른 특이점이 있을 뿐이다. 그 특이점이 나에게 기쁨을 주는지 또는 다른 이들에게 이득이나 기쁨을 주는 지로 생각하게 된다. 나는 듣는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 왜 과거형이 되었냐면, 나는 내가 듣는 것을 잘하는 줄 알고 열심히 들으며 관계를 유지했다. 다행히 그것은 예전이 되었다. 나의 피드백이 듣는 이의 상처를 보듬고 내 위로가 기억 남는 괜찮은 말이 되기를 바랐다. 그 또한 내가 원하는 나의 이미지였겠지.


지금의 나는, 타인의 성향과 행동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자 고민을 해결해 주고 싶은 욕구가 큰 사람임을 알았다. 이제는 가십거리가 주제가 되면 이야기를 되도록 빠르게 종료하고 열심히 들어주었던 누군가의 고민이 쳇바퀴처럼 맴돌고 변화의 노력이 없어 보이면 그 사람의 걱정을 좀 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의 고민을 포기함에 점차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문제의 주인조차 의지가 없는 고민을 해결하는 건 나의 능력 밖의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전에 안쓰러움이 더 컸고 누군가의 상처를 토닥이는 데 급급했다. 나의 들어줌이 상대방의 기분 해소의 용도가 되더라도 나 스스로 그 정도로 만족할 줄도 알아야 했다. 그런 것도 친구라는 기능의 중요한 하나가 아닌가 싶다. 또는 생각 전환 정도의 가벼운 도움 정도.
 



 

그녀의 외로움에 나는 무슨 책임이 있나


같은 맥락으로 나는, 누군가의 외로움의 목소리를 잘 못 견뎠다. 카카오톡 프로필의 문장, SNS에 올라 온 내용이 불안정할 때 그것이 내 마음인 양 넘어가지를 못했다. 누군가를 콕 집어 말하지 못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일기 쓰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외롭고 두렵기 때문일 거다. 나름의 용기로 누군가에게 ‘나 힘들어’하고 이야기했을 때 반응이 시큰둥한 것은 또 한 번의 큰 상처니까. 그것을 알기에 내가 먼저 말 걸어주고 싶었다. ‘나한테는 말해도 돼.’하고.


‘요새 어떻게 지내’ 또는 ‘뭔 일 있는가’와 같은 문장을 던졌다. 대부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나열한다. 일어난 사건부터 그래서든 감정, 그사이의 정리된 마음이 어디까지인지와 그래도 아직 힘들고 괴롭다는 결론까지. 그렇게 나의 들어줌이 위안과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기쁨이 있었다.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나 자신이 좋았고 무엇보다 안쓰러운 진심이 그곳에 있었다.


힘들 때 ‘들어주는 귀’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열의 아홉은 대부분 속상한 마음에만 머물 뿐 발을 움직이질 않았다. 나의 에너지와 시간, 해결 방안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지칠 때 쯤이었다. 어느 날, 한 시간 가량의 통화를 듣고 있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그거 심리 상담비인데 돈 받고 들어줘야 한다고. 덧붙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진실한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도. 덕분에 나의 기쁨인 줄 알았던 ‘들어주는 시간’은 어영부영 그렇게 종료됐다.





눈이 내리고 캐럴이 들리는 마음


고민이라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살다 보면 생겨나는 고민은 ‘그래 너무도 중요하지 .’ 다만 우리는 생각하는 인간이기에 그 이후에 선택이라는 것을 한다.


하지만 정작 나의 고민이나 슬픔, 후회를 떨치기 위해서는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다음 스텝을 선택했다. 고민과 어려움을 다음 스텝을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로 변환하려 애썼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나의 심리 상담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해요.”라는 말을 건넸다. 마침 일에 관한 이야기 중 나온 말이기도 했기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 사람 나를 잘 모르면서 나의 능력치를 무시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대답의 여지를 못 찾고 입술을 살짝 안으로 깨물며 눈을 굴리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생각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일 거예요.’ 하며 말할 자신도 없었고 좀스러워 보이기 싫었다.


심리 상담 선생님은 아무래도 눈치가 빨랐는지 눈동자만 굴리는 내게 얼른 덧붙였다. “그 말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의 기준이에요. 타인이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다. 타인이 나와 일하며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것은 승아 씨 마음이 아니니까 통제할 수 없는 거예요. 일을 같이하면서 어떻게 안 힘들 수가 있겠어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이나 행동 같은 것은 비현실에 속합니다. 비현실적인 것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제야 나는 그 말을 인정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의 마음을 에너지로 변환해서 사용하는 것은 나의 감정을 무시해 버리는 일이었다. 심취해있던 음악을 급작스레 꺼버리고 다른 음악을 선곡해버리는 것과 같았다. 바로 다음 음악을 들어도 그 전의 음악은 잔상으로 남는다. 머릿속에 맴맴 도는데 ‘그냥 지금 새 음악을 즐겨’라고 말하면 더 엉망이 되버린다. 오히려 더 복잡하다. 그 어느 것도 깨끗이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었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기까지는 자기 발전의 고민보다 더욱 더 오랜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연인과의 이별 후와 마찬가지처럼 술을 퍼마시고 이야기하다 울고 웃고 또는 아무도 몰래 펑펑 우는 것 같은 미친놈 같아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며칠은 슬픔에 푹 담궈지다 나와야 한다. ‘나의 마음을 잘 보듬어줘라’ 같은 건 더 어렵게 느껴지니 그냥 미친 사람처럼 충실히 슬퍼 만해도 잘하는 것 같다. 어차피 우리가 평생을 슬픔 속에서 살 수는 없으니까.


최근 알아낸 발견은 ‘비워내기가 힘들면 좋은 것들로 그 위를 덮는 것’이었다. (이런 건 왜 이제야 알게 되는 걸까) 비현실에 속하는 타인의 행동에서 온 슬픔은 내가 어쩔 도리가 없기에 마음이 더욱 더 아프다. 혹여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도 우리 안에 존중을 잃지 않고 서로를 진득하니 붙들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떠올려봤다. 이상하고 재미난 농담은 못 해줘도 또는 살가운 제스처가 없어도 늘 묵묵히 진심을 말하는 몇몇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불현듯 안부를 전했다. ‘부족한 나란 사람이랑 인연을 계속해줘서 고맙다고. 자주 연락하기를 못 해도 앞으로 좀 더 해보겠다고. 그들에게 온 답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좋아졌다. 요새 내 마음이 한겨울 같더니만, 이제는 눈이 내리고 캐럴이 들리는 겨울이 되었다.





토크메이드의 거래처로 애정하는 두곳의 캔들브랜드. 잊고있던 나의 순간을 찾아 사진으로 보내주셨다.
나는 유용하실만한 샘플 키트를 보내드리고 거래처 사장님은 내게 촬영시 유용할 박스들을 보내주셨다. 만나지 못해도 따뜻한 소통이 가능하구나 생각하는 계기들.





결국은 뭐든 사람이다.


타인의 고민에 같이 마음 쓰렸고 해결되었으면 하는 건 늘 진심이었다. 나란 사람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더 좋은 곳으로 가자며 이끌고 올라가길 좋아하는 애였다. 어릴 때부터 여러 친구들과 걸을 때에도 맨 뒤에 뒤처져 조용히 따라오는 아이가 있다면, 맨 앞장서서는 못가도 중간쯤에서 이야기하며 같이 가는 것이 더 행복했다. 나의 이런 점은 꽃 수업을 하거나 브랜드를 할 때도 하나의 특징이 될 수 있었다. 꽃으로 맺어진 인연 중 나를 따라와 주고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내가 실제 해결해 주지 못할지라도 같이 고민하고 의논해 주는 것에 고마워했다. 길잡이는 못 되어줘도 꽃 친구 정도는 되어주고 싶었다. 꽃집 사장님이 된 나의 인연들이 이전의 굴레를 깨고 나와서 혼자된 것 같을 때, ‘아니 이거 사실은 되게 재밌는 거야.’라며  손 잡고 같이 즐기고 싶었다. 사실 그것이 나를 지탱하게 했고 스튜디오를 비우고도 플라워 브랜드를 지속할 수 있게도 했다. 


토크메이드라는 패키지 브랜드는 온라인 기반이고 수강생과 선생님 같은 관계가 없을 시스템이다 보니 처음에는 삭막함을 느꼈다. 브랜드에 애정을 갖기에 관계성이 더해지지 않아 제품을 올리고 파는 일은 역시 고독한 일이네 싶었는데 이제는 이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뭐든 사람이다. 점점 더 나 자신이 브랜드가 되는 시대에 살면서 나의 이런 점을 잘 조절하면 꽤 괜찮은 것 같다. 내 얼굴을 찍어 올리거나 스타일리시한 라이프를 보여주는 것에는 소질이 없어 나 자체의 삶을 시각적으로 근사하게 브랜딩 할 수는 없지만, 온라인상에서도 챙김 받고 챙겨주는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는 될 수 있다. 우리는 실제 보지 못해도 꽤 괜찮은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을 서로 알아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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