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 트레이닝 시스템 이식하기
내가 처음 이 회사를 다니게 된 계기는 친구인 J 덕분이었다. 미국 본사를 기반으로 한국에 법인이 세워졌지만, 그 안에는 직원도, 체계라고 부를 만한 것도 거의 없었다. 회사 직원은 단 두 명, J와 나였다. 기본적인 문서 양식조차 없었던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씩 형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업무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하고는 있지만, 그 일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틀과 전체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대부분의 업무는 여전히 어깨너머로 보며 배워야 했다. 다른 회사 직원이 작업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 보고, 실수를 통해 다시 익히는 방식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도 그 과정은 자연스러웠고,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은 현장이 그렇게 돌아간다.
누군가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설명을 듣기보다 먼저 해보고, 틀리면 고치고, 그렇게 반복하면서 익히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그 방식에 의문을 가질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작업이 손에 익숙해질수록 이 반복되는 방식의 한계가 점점 더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미 앞선 글에서 충분히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 더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매뉴얼을 만들고 트레이닝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처음에는 그 과정을 그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같은 상황이 다시 왔을 때, 조금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것들, 막혔던 지점, 그 순간에 내렸던 판단들을 하나씩 글로 남겨두었다. 그렇게 쌓인 기록들이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한 메모 이상의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한 번의 사이클이 돌면 그 과정을 다시 떠올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을 따라 정리했다. 어떤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지점에서 주의가 필요했는지를 스스로 다시 설명해 보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모여있는 기록들을 갖고 하나의 문서 형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단순히 나를 위한 메모가 아니라, 누군가가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만 설명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설치 과정이나 구조적인 부분은 문장만으로는 전달이 어려웠다. 그래서 직접 삽화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작업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위치나 방향, 연결 구조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디자이너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과정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글보다 더 명확하게 전달되는 순가도 많았다. 그렇게 문서와 삽화가 결합되면서 기록은 점점 더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각각의 문서들은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문서들을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설명의 방식과 표현에 통일성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읽는 사람에게 피로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는 명확해지고, 이해는 쉬워졌지만 읽기 불편한 문서는 결국 외면받기에 문서 제작에 구조가 필요했다.
문서의 내용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를 확인한 순간 나는 이제 어떻게 더 많이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통일감을 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이 고민은 나에게 익숙한 한 가지 경험과 연결되었다. 디자이너로 일할 때, 디자인을 만들기 전에 먼저 시스템을 만든다. 색상, 타이포그래피, 간격, 구성 방식과 같은 기준을 먼저 정하고 그 안에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래야 누구나 같은 기준으로 작업할 수 있고, 결과물 또한 일정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방식을 문서 제작에도 그대로 적용해 보기로 했다. 문서를 잘 쓰는 것이 아니라, 문서를 만들기 위한 구조를 먼저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문서 작성에 대한 기준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떤 순서로 내용을 전개할 것인지,
어디까지를 한 단계로 나눌 것인지,
설명과 작업을 어떤 비율로 배치할 것인지,
어떤 표현 방식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만들었다.
1. 구조(Structure)
나는 구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을 작성하는데 필요한 뼈대가 되기 때문이다.
� 반드시 정의해야 할 것:
문서의 기본 구성 순서 : 예) 목적 > 준비 > 작업순서 > 체크포인트 > 완료 기준 및 팁
단계 구분 기준: 각 단계를 어디까지를 한 스텝으로 볼 것인가 정의
문서 단위: 문서 하나가 갖는 범위 정하기.
2. 흐름(Flow)
사용자가 따라갈 수 있어야 하고, 사용자에게 익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작업 순서와 문서 흐름이 동일해야 하고, 실제 현장 행동과 동일한 흐름을 가져야 한다. 즉, 읽는 순서가 작업 순서이다. 그래서 설명 중심보다는 행동 중심으로 구성했다.
3. 표현 방식(Language and Format)
통일성은 핵심이다. 같은 표현을 작성하기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드렸고,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는 부분 중에 하나이다. 특히 용어 정의(Terminology)가 핵심으로 사용자에게 익숙한 용어와 기준이 되는 용어를 활용해야 한다.
문장 스타일도 통일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확인한다" 또는 "확인해 주세요."와 같이 명령어로 할지, 설명형으로 할지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4. 시각요소(Visual System)
아이콘 사용 규칙을 통일했고, 색상도 약속된 색상만 사용했다. 예를 들어 경고는 빨간색, 주의는 노란색, 중요는 파란색과 같은 규칙을 주었다. 삽화 스타일도 통일했으며 삽화에서 피사체의 각도도 유사하게 통일했다. 물론 레이아웃도 통일해서 자간, 행간을 정했고, 글 흐름등 타이포그래피 설계(Typography System)도 통일시켰다. 구조적 시각 요소와 사용자의 인지 및 읽기 설계를 한 것이다.
그 기준에 맞춰 문서를 다시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부분을 정리하고 흐름을 맞추는 것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읽히고,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구조를 맞추고 나니 문서는 더 이상 개별적인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보이기 시작했다. 또,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어디서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예측할 수 있었고, 문서를 따라가는 부담이 줄어들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은 있었지만,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이들은 설명을 따라오는 경우가 많지만, 성인은 스스로 납득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더라도,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설명을 잘하는 방법이 아니라, 이해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고민하게 되었다.
어떤 순서로 정보를 제시해야 하는지, 어떤 구조가 학습에 더 효과적인지, 사람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흐름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다시 처음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교육학 논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현장에서의 경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고,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이론적인 근거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논문을 읽고, 그 안에서 더 깊이 이해해야 할 부분이 나오면 참고 문헌으로 연결된 책을 다시 찾아 읽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자료를 찾는 수준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다시 정의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이해하려는 과정이다 보니 생각보다 어려웠고,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체감상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듯하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문서를 계속 수정했고, 구조를 바꾸고, 다시 적용해 보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
문서를 계속 개선해 나가면서도, 한 가지 한계는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문서만으로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설치 과정이나 장비의 구조, 그리고 작업의 흐름과 같이 움직임이 포함된 내용은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여도 완전히 전달되지 않았다.
읽는 사람은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현장에서 작업을 시작하면 다시 처음부터 막히는 경우가 반복되었다. 그때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매뉴얼의 본질인 정보를 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전달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서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답은 영상이었다. 작업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고, 구조를 눈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영상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로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내가 일하는 환경에서는 보안 문제로 인해 영상 촬영이 불가능했다. 사진조차 제한되는 상황에서 현장을 그대로 촬영해 교육 자료로 사용하는 것은 애초에 선택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때 떠올린 것이 3D 모델링이었다.
원래 하던 업무도 아니었고, 내 업무와 연결점도 없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3D 모델링 툴을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장비의 구조를 직접 모델링하고, 설치 과정을 하나씩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했다.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작업 흐름과 동일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어디서 시작하고 어떤 순서로 진행되며 어디에서 주의해야 하는지를 눈으로 따라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리고 그 위에 설명을 덧붙이고, 편집을 통해 하나의 교육용 영상으로 완성했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기존 업무와 병행하면서 퇴근 이후의 시간과 주말을 활용해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모델링, 애니메이션, 편집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작업의 밀도 또한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문서로는 전달되지 않던 부분들이 영상에서는 명확하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구조에 대한 이해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영상 매뉴얼까지 만들어지면서 나는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자료는 점점 쌓이고 있었고, 그 완성도 또한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자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교육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과정에서 트레이닝 센터와 LMS를 활용한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먼저 트레이닝 센터에서는 교육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구성했다. 강사를 배치하고, 교육 커리큘럼을 설계하고, 단순한 이론 전달이 아니라 직접 해보면서 익힐 수 있는 핸즈온 트레이닝을 함께 운영했다. 이 공간은 단순한 교육장이 아니라, 학습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 내가 했던 질문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학습자가 어떤 동선으로 이동하는 것이 효율적일까?
어떤 흐름으로 학습이 이어져야 하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물리적인 공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모든 인원을 한 곳에서 교육할 수 없었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교육의 접근성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미국의 다른 주에 있는 직원들은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방법을 고민하다가 LMS를 활용한 온라인 교육 구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기존에 만들어 두었던 문서와 영상 콘텐츠를 기반으로 교육 과정을 재구성하고, 누구나 필요한 시점에 학습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확장했다. 이렇게 되면서 교육은 특정 장소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든 이어질 수 있는 구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을 돌아보면 기술적인 어려움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은 따로 있다. 바로 혼자 한다는 감정이었다. 처음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일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이 고민하고, 같이 방향을 만들고,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붙여보고, 직접 가르쳐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 구조는 쉽게 유지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다른 팀으로 이동했고, 함께 만들던 흐름은 다시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혼자 시작했던 일이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혼자 할 수 있는 일"로 보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고립게 가까운 것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만들고 싶었던 구조가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가장 힘들게 다가왔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경험은 VR 트레이닝 콘텐츠 프로젝트였다. 단순히 매뉴얼을 보는 것을 넘어서 직접 체험하며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실제 작업처럼 나사를 조이고 풀고, 과정을 따라가며 학습할 수 있는 VR 기반 트레이닝 콘텐츠를 제작했다. (이때는 프로그래머와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 신규 입사자 한 명을 설득해 코딩을 공부하도록 했고, 다행히도 그 친구는 이 작업에 큰 흥미를 느끼며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었다. 총 4번의 프로토 타입 후에 2개의 콘탠츠를 제작하였고, 내부와 외부 고객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고, 박람회에 참여할 만큼 가능성을 확인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VR이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AR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장비 유지보수나 관리 측면에서 현실 환경과 결합되는 AR이 더 높은 활용도를 가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에는 AR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디바이스가 부족했다. 결국 현실적인 선택으로 VR을 먼저 구현하고, 이후 확장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나는 당시 기술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어디까지 확장 가능한지를 중심으로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조직의 시선은 달랐다. VR이라는 결과물이 나오자 그것을 하나의 "보이는 콘텐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프로젝트의 방향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존에 함께하던 개발자(우리 불쌍한 신입이)가 아닌 다른 프로그래머가 채용되었고, 프로젝트는 정식 과제로 전환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표의 개입이 점점 커졌고, 내가 처음 설계했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비즈니스로 이어지지 못했다. 내부에서도 큰 관심을 잃었고, 지속적으로 확장되지도 못했다. 외부에서는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그 이후로 프로젝트는 조용히 멈추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프로젝트가 멈춘 이후, 그 과정에 대한 논의도, 평가도, 회고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패에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 이유를 공유하려는 움직임 없이 모든 책임과 부담은 내가 짊어지는 듯했다. 누구도 그 부담감을 주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시작했기에 내가 느끼는 부담은 컸다. 그리고 그저 조용히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