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만난 회사가 아닌 우리

by RAMI

그날의 우리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입사 후 지금까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셀 수 없이 미국으로 출장을 다녔지만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고객으로부터 받는 갑질은 마치 차별처럼 느껴졌다. 타국에서 마주한 차별은 더욱 가슴을 쓰리게 했다. 입은 있지만 제대로 항의 한마디 못하는 초라한 영어 실력 때문에 미워해야 할 대상이 점점 나 자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500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예정된 시간이 한참 지나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차 안은 세 명의 남성이 타있었지만 적막으로 가득했다. 분명 목적지가 있지만, 어스름하게 번져오는 어둠 속에서 우리 셋 모두 마치 갈 길을 잃은 듯 아무런 대화 없이 내비게이션의 음성에 따라 익숙하고 지루한 길을 달렸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우회전해야 하는 교차로를 무시한 채, 우리는 그대로 직진해서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안에는 초라한 행색의 노숙자들 몇 명이 초점 없는 눈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이방인인 우리와 집 없는 그들의 처지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몇 분 후 주문한 커피를 들고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초라한 걸음으로 카페를 나와 다시 차에 올랐다.


"사막을 보러 갈래?"


차가운 음료를 들이켜고 나서 한숨처럼 내뱉은 한마디에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아니, 지쳐버린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우리는 '사막'이라는 단어에 기대었다. 그리고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난 채, 더 멀어지길 원했다.


J가 운전대를 잡았다. 우리는 달콤한 밤의 향기를 맡으며 고속도로를 거슬러 올라갔다. 도로는 부드러웠으며 빛은 춤을 추었다. J는 급하게 차를 세웠다.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처진 채 뒷자리로 옮겼갔다. 이번에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눈앞에는 다시 빛의 춤사위가 펼쳐졌다. 눈앞에서 현란하게 움직였다. 빛은 우리의 일탈을 같이 즐기고자 했으나 나는 아직 그럴 여유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 시간 조금 넘게 운전을 하고 탈진해 버렸다. 나 역시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보조석에 구겨졌다.


다행히도 우리는 셋이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지치면 다른 누군가가 운전대를 잡으면 되었다. 운전자를 바꾸기 위해 가로등 불빛조차 희미한 곳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연기 머금은 한숨으로 피곤을 달래며 멍하니 지나가는 차를 응시할 때, 서늘한 밤공기가 옷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찬 바람의 포옹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하늘로 젖혀졌다. 눈이 닿은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가득했다. 입을 벌려 답답함을 담은 연기를 천천히 토해내자, 별빛아래 흩어지며 사라졌다.

도로 어디인가


'마지막 운전자인 H도 분명 피곤할 텐데...'

아직 목적지까지 한 시간도 더 넘아 있었다. 마지막 운전자의 책임을 H에게 떠넘긴 상황이 못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였을까.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다. 처음엔 억지로 상황을 풀고,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한 농담이었지만, 떠나온 길이 점점 멀어질수록 이런 농담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별빛이 내려앉은 길 위로 다시 밤을 달렸다. 가로등조차 없는 어둠 속을 헤매는 듯했지만, 피곤할 때 서로에게 기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지금 내가 처한 이 막막한 길도 함께 걷는 이들이 있기에 끝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서로를 의지하면서 말이다. 때로는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흐릿한 별빛 하나에 의지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결국 웃을 수 있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회사'라는 큰 집단이 아니라 '우리'라는 하나의 작은 연대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마치 집에서는 느낄 수 없던 포근함을 낡고 작은 이불속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J와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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