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게 퍼진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어버린 흐린 날이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빗방울이 떨어질 수 있을 것처럼 하늘은 낮게 내려와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카페에 들어가자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고,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대화가 음악의 빈 공간을 채워 넣었다. 2층 창가에 앉아 조용해진 밖을 내려다보았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평소보다 천천히 지나갔다.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가만히 바라보다 맞은편 테이블에 한 여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편지를 쓰는 사람을 참 오랜만에 본다. 요즘 같은 시대에, 키보드도 아니고 휴대폰도 아닌 종이 위에 펜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손을 움직이다가 멈추고 천장을 바라보고를 또 펜을 종이에 대었다가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기를 연신 반복하였다. 커피 잔에서 피어오른 수증기가 내 눈앞을 스쳤고, 이내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채도가 낮은 필름처럼 변하였다.
편지는 참 느린 매체다. 한 문장을 써 내려가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혹여나 쓰다가 틀릴까 봐 한 자 한 자에 정성을 다한다. 내가 보내는 이 편지가 받는 이에게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그 이가 편지를 받았는지, 어떤 반응이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불 확실함 속에서도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으며 또 한 번 고쳐 쓰고, 또 한 번 고민한다. 이 말에 그에게 어떻게 다다를지... 이 문장이 지나치게 무겁지는 않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저 여인은 누구에게 저리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고 있을까? 저 펜 끝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태어나고,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사소한 안부를 의미 있게 남기는 것일까? 그조차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보내는 정성스러운 사과일 수도 있고, 이미 끝난 관계에서 보내는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편지를 쓰는 지금이라는 과거에서 이 글을 받아볼 누군가의 미래를 향해 펜을 움직인다.
내가 편지를 써본 것이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의 마음은 어렴풋이 남아있다. 보내고 싶었지만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감정, 말로 하면 너무 가벼워질 것 같아 글로 옮겼던 생각들. 심지어 며칠을 정성스럽게 작성하고 보내지 못했던 편지까지. 편지는 그런 마음과 감정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
무라세 타카시의 책 '세상의 마지막 우체국'에서는 소중한 이를 잃은 분들 천국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우체국에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과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담아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후회와 못다 한 이야기들 그리고 좌절을 써 내려가지만, 글을 쓰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이미 천국에 간 이에게 안정과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편지는 늘 그런 역할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글이지만, 그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가장 깊이 말을 건네는 대상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같이 구름도 천천히 흘러가는 날에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밝아야 할 이유도, 활기차야 할 의무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종이 위의 잉크로 번져나간다면 아마도 조금은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꾸미지 않은 마음, 화려하지 않은 문장 그리고 침묵까지 편지지 위에 자신을 위한 시간을 담는다.
여인이 카페를 나서고, 그녀가 앉았던 자리는 곧 다른 손님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저 여인이 편지에 담은 온기가 남아있어 여전히 내 커피 잔은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