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데도 용기가 필요한가?

by RAMI

회사에서 벌어지는 감정적인 문제는 더 이상 내 글에서 다루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그 이유는 브런치에 작성하는 글에서 만큼은 그냥 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한 것들을 말이다. 그런데도 결국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어떻게 하겠는가. 글의 소재가 떨어졌다는 이유가 가장 큰 핑계이고, 지금의 감정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다. 글을 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공부하고, 반면교사 삼아 나를 돌아보며 메타인지를 조금이라도 확장해보고 싶다. 또한 이 역시 내 이야기 아닌가.


내가 다니는 회사는 늘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여느 회사나 그럴 것이다. 문제는 늘 있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늘 같은 자리에서 넘어진다. 이상하리 만큼 비슷한 곳에서 돌부리에 계속 발이 걸리는 것처럼 비슷한 이유와 비슷한 문제로 넘어진다. 사람도 계속 바뀌고, 조직도 변하는데 이상하게 문제의 형태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문제가 발생하는 일 자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직이 살아 있는 이상, 갈등도 생기고 외부적 충돌도 발생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 조직은 가장 먼저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구조를 보거나 맥락을 따지기 전에, 우선 사람부터 문제 안으로 밀어 넣는다. 누군가는 문제를 떠안아야 하는 원인이 되고, 누군가는 책임자가 되고, 누군가는 해결자가 되어야 한다. 조직이 아니라 사람이 말이다. 결국 문제는 곧 '누군가의 문제'가 되고, 조직은 '피해자'가 된다. 그 순간부터 상황은 감정의 영역으로 미친 듯이 휩쓸려 들어간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 아래, 사람의 머릿수를 늘린다. 손가락질이 난무하는 회의는 많아지고, 말은 늘어나지만 정작 문제에 대한 본질적 논의가 없는 불필요한 회의에 상황과 분위기는 더 무거워진다. 각자의 입장과 감정, 이해관계가 겹겹이 쌓이면서, 처음보다 훨씬 복잡한 형태로 변해버린다. 마치 어린아이가 실타래를 갖고 놀다가 엉켜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왜'라는 질문이 사라진다. "왜 이 문제가 반복되는지",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인지", 구조의 문제인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환경적 요인은 없는지" 같은 질문들은 늘 급한 해결과 즉각적인 대응이라는 이름 아래 밀려난다. 조직은 문제를 바라볼 여유를 갖지 않는다. 문제 안으로 사람을 밀어 넣으면서, 그것이 책임감이고 성실함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이 회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견딜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당장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우리가 지금 어떤 환경에 놓였고, 어떤 구조 속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면서 이 문제가 정말 개인의 역량이나 태도의 문제인지, 아니면 시스템의 문제인지 묻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왜"라는 질문이야말로 문제를 다루는 데 필요한 첫 번째 단계라고 믿는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를 관조(Theoria)라고 불렀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를 말할 때, 곧바로 행동하기 전에 한 걸음 물러서서 사태 전체를 바라보는 태도를 중요하게 말했다. 감정에 휘둘린 판단이 아니라, 맥락을 이해한 뒤에 선택하는 힘. 그것은 단순한 사유가 아니라 행동을 바르게 만들기 위한 준비라고 보았다.


문제에서의 한 두 발자국 후퇴. 이것은 도망도 아니고, 책임 회피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가까이 붙어버린 문제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어,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소음인지를 관찰하는 것에 가깝다. 문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믿는 태도와는 정반대의 방향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조직에서는 이러한 관조가 종종 무능함으로 오해를 받는다. 즉각적인 반응이 없으면 책임을 회피한다고 말하고, 질문을 던지면 실행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문제에 파묻히고, 더 많은 감정을 쏟아붓게 된다. 그렇게 문제는 해결되기보다 확대된 채 관리된다.


그들은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아마도 가장 큰 두려움은, 문제를 구조의 언어로 옮기는 순간 더 이상 빠른 결론을 낼 수 없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쉽게 말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믿어온 밀어붙이기식 일처리가 부정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잘못으로 정리하면 책임은 명확해지고, 분노의 방향도 정해진다. 그러면서 조직은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안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구조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문제는 단번에 끝나지 않고, 우리가 만든 환경이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이 질문은 참으로 불편할 것이다.

누군가의 실수가 아니라, 조직의 선택과 관행, 무관심으로 반복해 온 방식이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문제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가 된다. 그렇기에 관조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책임을 나누자는 말처럼 들리고, 때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오해될까 봐? 그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또 다른 두려움은 시간이다.

바라보는 데 있어서 시간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대응도 중요하지만, 잠시 멈추고 바라봐야 한다. 그 사이 불안은 커진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일이 더 커질 것 같고, 통제력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보고서, 더 많은 사람 투입, 불필요한 회의들과 같이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안전장치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끝을 알 수 없는 고민의 시간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바쁨 속에서 문제는 반복된다.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는 형태만 바뀌어 다시 등장한다. 같은 지점에서 또 발생한다. 결국 바닥에 박혀 있는 돌부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돌부리를 피하지 못한 누군가의 가슴에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감정을 소모한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견딜 사람만 바뀌는 셈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문제를 관조하는 데 필요한 용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능력보다 더 희귀한 자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빠르게 답을 내리는 용기가 아니라, 답을 미루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원인을 좀 더 생각해 보자.",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그래서 관조는 무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당장 누군가에게 책임을 씌우는 대신, 이 문제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안정 대신, 장기적인 회복과 성장을 선택하는 일이다.


문제에서 한두 발짝 물러서는 것은,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더 오래 붙들겠다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선언은 개개인에게 요구되기보다, 조직이 허용해야 가능한 태도이다. 만약 한 걸음 물러서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면, 지금 우리 조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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