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 지나가는 영감을 붙잡기 위해
약 한 달 전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하려고 마음먹은 후로 머릿속에 종종 쓸만한 문장들이 떠다닌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수년 전 블로그 포스팅을 열심히 할 때나 대학에서 소설 창작 수업 과제를 준비할 때와 같이 무언가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써먹기 좋은 문장들이 문득 뇌리에 스치곤 했다. ‘영감이 떠오른다’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건가 싶다. 떠오르는 문장들이 하나같이 ‘이걸 넣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는, 나름대로 괜찮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현상이 인간의 두뇌가 가지고 있는 기능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두뇌가 가진 잠재력의 극히 일부만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과연 수면 위로 드러나 있는 빙산의 일각만이 우리가 사용하는 전부일까? 물에 잠겨 있는 커다란 아랫부분도 무언가 작용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뇌과학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이 ‘문장 떠오름 현상’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잠재의식 중에 두뇌가 열심히 작업을 한 결과물일 것이라고 멋대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머릿속 문장들은 글로 옮겨지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떠오른 문장들은 바로 적어놓지 않으면 금방 잊힌다는 점이다. 예고도 없이 ‘오다 주웠다’ 같은 느낌으로 머릿속에 툭 내뱉어지는 문장들은, 어딘가에 써 두지 않으면 이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그다음 문제가 또 있다. 적어놓기 귀찮아하는 내 게으름 때문에 최근 떠오른 수많은 문장들은 글이 되지 못했다. 그것들을 잘 모아두었다면 벌써 몇 편의 글이 더 나왔을지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서 글을 쓰기 위해 메모를 습관화하는 것이 시급한 이유다.
애석하게도 글쓰기에 활용하고 싶은 좋은 문장들과 아이디어들은 내가 바로 적어 놓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주로 떠오른다. 설거지를 할 때, 머리 감을 때/감고 나서 말리는 중에, 휴대폰 없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등등. 여러 상황 중에서 특히 가장 많은 문구가 떠오르는 순간은 저녁 샤워를 하는 도중이다.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있자면, 글쓰기에 활용할 만한 좋은 문장이 떠오를 때가 있다. 잠들기 전에 괜찮은 글 하나를 뚝딱 써 내려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다 씻고 나와서 물기를 닦고 있으면 서서히 기억이 휘발되기 시작한다. 나는 그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잘 기억할 거니까 마무리 다 하고 써도 충분해’라고 스스로를 과신하며, 기초화장품과 바디로션을 꼼꼼히 바르고 머리도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나서야 노트북이 놓인 책상 앞에 앉는다. 당연히 아까 떠올렸던 문장이 기억나지 않는다. 한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보며 기억을 더듬어도 몇 개의 단어 정도만 머릿속을 떠다닐 뿐이다.
이런 식으로 최근 한 달여간 떠올리고-잊고를 반복한 끝에 나는 드디어 오늘(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면서 앞으로 메모를 제때 하리라고 진정으로 다짐했다. ‘기억해 뒀다가 써야지’라는 건 지나치게 안일한 생각으로, 나중에는 ‘기억하려고 한 게 뭐였지?’만 남게 된다(잊어버렸던 문장이 비슷하게 다시 떠오를 때도 가끔 있기는 하다). 그렇기에 글쓰기를 위한 좋은 문장이 생각나면 무조건 가능한 한 빨리 기록해 두는 것이 상책이다. 오늘날은 기술의 발전으로 휴대폰이 방수 기능까지 갖추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샤워 중이든 수영 중이든 생각난 것을 메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귀찮을 뿐. 그러나 번거로움을 이겨내고 메모를 하는 정도의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더 만족스러운 글을 쓸 수 있다면 메모를 안 할 이유가 없다.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게으름이 심한 귀차니스트지만,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서, 좋은 생각을 붙들어 놓고 내 글에 녹이기 위해서 이제부터 메모하기를 습관화할 것이다.
메모 습관을 권장하는 책과 강연에서는 “메모가 천재를 만든다”는 명언과 함께 에디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뉴턴 등 역사상 천재로 불렸던 인물들을 언급하곤 한다. 혹시 이들은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천재성, 즉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영감들을 빼놓지 않고 메모하고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