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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노 May 06. 2016

아이들의 놀이와 놀잇감.

「파란의자」 -클로드 부종

  아무 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에스카르빌과 샤부도는 파란 의자 하나를 발견한다. 그 파란 의자를 가지고 이들은 여러 가지 상상놀이에 빠져든다. 파란 의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들의 상상놀이에서 파란 의자는 서커스를 위한 기구가 되고, 사나운 짐승을 막기 위한 방패가 되고, 가게 놀이에 쓰이는 계산대도 되었다가 상어가 있는 바다를 떠다니는 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침 사막을 지나던 낙타가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훼방을 놓는다. 그리고 의자의 바른 용도를 일러준다. 바로 ‘앉는 것’이라는 의자의 기능을.     

  딸 아이가 17개월 쯤, 처음으로 문화센터를 갔다. 창의력을 길러준다는 오감발달 놀이었다. 그리고 첫 수업을 듣고 오던 날,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1. 아이들이 자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혹은 흥미를 유지시키기 위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자극.

2. 자율적 흥미의 지속을 단절시키는 활동단계로의 강제적 이행

3. 이미 구조화된 놀이와 놀잇감.

4. 교육적 관점이 반영된 의도적 놀이.    

 

  유아교육 전공은 아니지만 교사라는 나의 직업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처음 경험해 본 놀이프로그램은 정말로 잘 조직된 ‘수업’이었다. 나름의 활동목표가 있고, 그에 따른 동기유발과 활동들, 정리 단계까지 있었다. 선생님도 매우 친절했고 능숙했다.  그러나 아이는 놀이 활동에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자꾸 현란하게 왔다 갔다하는 눈 앞의 놀잇감들을 힘들어했다. 게다가 그나마 좀 가지고 놀던 블록이 치워지자 발버둥을 치고 울었다. 화려한 놀잇감과 재미나보이는 활동이 계속 됐지만 그것은 '놀이'일 수가 없었다.


   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영유아 프로그램이 차고 넘친다.  무슨무슨 교구와 같은 놀잇감이 넘쳐나고 그것을 가지고 놀면 우리 아이 감각발달과 창의력, 사고력이  쑥쑥 자랄 것만 같다. 심지어 이러한 교구를 들이고나면, 체계적으로 놀이를 해주기 위한 관련 놀이 교사가 따라 붙기도 한다. 심지어 어릴 때 많이 논 아이가 똑똑하고 창의적이라는 말 속에도 엄연히 어떠한 목적과 의도가 들어있다.    

  

  아이들의 놀이가 창의적인 이유는 그 안에 감추어진 과제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과제 목적에 따라 구조화되고 기능적으로 그 용도가 정해진 놀잇감은 아이에게 기술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길러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변형하고 지배할 수 있는 창조력을 길러낼 수는 없다. 오히려 단순하고 완벽하지 않을 때, 아이들은 그 놀잇감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굳이 어떠한 발달 이론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의 놀이를 가만히 관찰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침대 위에 무심히 놓여있는 베게를 하나 가지고도  징검다리를 만들어 폴짝폴짝 뛰어다녔다가, 자동차를 만들어 뒤에 좋아하는 인형 친구들을 태워 운전놀이를 하다가, 산처럼 높이 쌓아 폴짝 뛰어내리기도 하고, 쇼파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미끄럼틀을 만들어 논다. 부모가 고심 끝에  일부러 큰 맘 먹고 사다놓은 멋진 놀잇감들은 한 쪽 구석에 쳐박아놓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어떤 의도적 교육을 거부하고 무위의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자 하는 엄마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언스쿨링이라든지 제도권교육으로부터의 탈피,  소비주의적 육아 사회에 저항하고자 하는 선두주자로 설 만큼 용기도 신념도 없다. 솔직히 고백하면, 내 자식은 사다리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과 이기심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 한 켠에 도사리는 불안감에 흔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유년기의 가장 따스하고 풍요로운 기억은 놀이터 구석에 앉아 ‘모래알로 떡 해먹고 조약돌로 소반지어’ 놀던 순간들이다. 창의적 역량 어쩌고하는 거창한 이유는 다 집어치우고, 그저 유년기에 허락되는 그 풍요로운 자유와 따스한 감성을 해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아이들의 놀이의 영역에까지 은밀하게 교육과 학습 목적을 들이댄다는 것이 숨이 막히고 슬프다.   


 사막에 나타난 가장 뻔한 존재인 낙타는 매우 엄숙한 표정으로 파란 의자에 앉는다. 에스카르빌과 샤부도는 여간해선 꿈쩍도 안할 것 같은 낙타를 의자에 남겨두고 다른 놀이를 찾아 떠난다. 그들의 생뚱맞은 표정이 낙타의 엄숙함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며 웃음을 자아낸다.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은 어른들의 목적이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장(場)을 의미할 것이다. 삭막해 보이는 사막에서도 아이들은 논다. 어쩌면 아무런 목적이 없기 때문에 더 재미나게 놀이에 빠져들 것이다. 그래서 낙타의 뻔한 고리타분함을 비웃는 둘의 태도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알고 있다. 그깟 교구 안 들여도, 입소문 난 교육프로그램을 하지 않는다 해도 큰 일 나지 않듯이 그러한 것에 노출된다해서 역시 무슨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은 그 틈 속에서도 자신들의 공간을 찾아내고 그들의 놀이를 즐긴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아이들의 생명력이란 것을. 마치 에스카르빌과 샤부도가 고리타분한 낙타를 비웃으며 뒤돌아선 것처럼 말이다. 친절한 얼굴로 그 의도와 목적을 뒤에 감추고 접근하더라도 그 뻔함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무관심으로 응답하여 어른들을 애태우듯이.

 그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지켜보고 내버려둘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섣불리 무엇을 세팅하거나 혹은 제거하려 들지 않는 기다림과 인내심이다. 그것 아이의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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