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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Jan 05. 2021

작곡가면 베토벤처럼 오선지에 악보 그리는 거예요?

귀가 잘 들리는 한 작곡가의 백한 가지 노동에 관하여


  전 클래식 음악을 하는 작곡가입니다. 얼마 전까지 챔버 오케스트라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이번엔 작곡은 아니고, 이미 있는 곡들을 주어진 악기 편성에 맞게 편곡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편곡 작업을 끝내면, 악보를 PDF로 만들어 지휘자에게 이메일로 보내면 됩니다. 간편한 세상이죠! 오늘은 그 작업기를 적어볼까 합니다.


1. 일단 구상을 합니다.

  작곡한다고 하면 베토벤처럼 책상에 앉아서 작곡하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하는데, 그 비스무리한 모양새로 앉아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베토벤의 마음가짐으로다가 빈 오선지를 바라보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이 밀려옵니다. 역시.. 전 베토벤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절망은 이릅니다. 우린 21세기에 IT강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손으로 그린 악보 보신 적 있나요? 여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악보도 결국은 컴퓨터 작업이 필요합니다.

  

2. 악보를 만드는 프로그램을 켭니다.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건 종이 오선지보다 좀 더 빨리빨리 수정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져옵니다. 위대한 ctrl+c, v / ctrl+z는 악보 프로그램에서도 유효해요. 작곡 라이프, 사실 워드프로세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축키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저는 주로 이런 미니미한 건반을 연결해서 사용합니다.


3. 중간 점검

  보통 3-4분짜리 곡이면 대략 70-110마디 내외입니다. 자, 단축키와 함께 20마디까지 왔습니다. 이때까지 쓴 곡을 들어보고 싶군요. 베토벤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작곡가들은 악보를 보면 대충 소리를 상상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집중해서 오선지를 바라보며 머리속에서 오케스트라를 상상...하려다가.....플레이버튼을 누릅니다. 베선생님도 2021년도에 작곡하셨으면 그냥 플레이 버튼 눌렀을 걸요...? 이렇게 편한걸!


  들어봤습니다. 베토벤 운운한 게 부끄러워집니다. 별로예요. 1번으로 돌아갑니다.



4. 중중간점검

  다시 들어보고.... 다시 1번.


5. 중중중간정검


6. 중중중중중중간점검

  1번으로 돌아가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하도 많이 들었더니 이제 좋은지 나쁜지 판단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어요. 간을 너무 많이 봐서 미각을 잃어버린 요리사가 된 느낌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뇌를 꺼낸다음 물로 씻어서 처음 듣는 상태로 돌아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추 된 것 같아요! 오늘은 이제 그만하고 자야겠어요.








7. 다음날이 밝았습니다!

  상콤한 기분으로 어제 쓴 걸 들어볼까요?

곡을 쓴 바로뒤의 느낌 (위) / 다음날 다시 들어볼때의 느낌 (아래)

.............. 누군가 어제 똥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다시 1번으로...






8. 이제 음표를 다 그렸습니다!

  억겁의 세월이 지난 것 같네요. 쭉 들어보니 괜찮은 것 같고요! 끝이냐고요? 이제 셈여림을 적어봅니다. 셈여림은 악보에 적혀있는 피아노, 포르테 등을 말합니다.


9. 멜로디와 셈여림이 있는 악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각종 기호들의 차례입니다. 스타카토, 엑센트, 페르마타 같은 자잘한 것들을 넣어줍니다.


10. 멜로디와 셈여림과 기호들이 있는 악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빠르기말과 나타냄 말을 적어봅니다. 아다지오, 돌체, 뭐 이런 것들이에요.


11. 멜로디와 셈여림과 기호와 빠르기말과 나타냄말이 적힌 악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현악기의 슬러 표시와 하프의 페달링을 적어줍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신다고요?.. 다음에 마저 적겠습니다. 아직 갈길이 멀어서요 ㅠㅠㅠㅠㅠ

 

12. 1=12가 되는 기적의 악보

  근데 그거 아세요? 백 마디짜리 곡은 사실 백 마디가 아닙니다. 오케스트라는 한 번에 연주하는 악기들이 아주 많고, 이 악기들은 악보에 세로로 길게 쌓아져 있습니다. 이걸 총보라고 부르지요. 총보는 한마디를 입력하려면 사실 열두 마디를 입력해야 하는 기적의 악보예요. 입력해야 할 정보가 아주..아주.. 많다는 뜻이지요^^..

7마디 길이 * 세로로 12마디 = 벌써 84마디



13. 멜로디와 셈여림과 기호와 빠르기말ㄱ........ 대충 다 한 것 같습니다!

  이제 가상 음원을 추출합니다! 악보도 PDF로 출력합니다!


14. 클라이언트에게 이메일을 보냅니다.

  안녕하세요 땡땡님, 악보 보내드립니다. 첨부드리는 음원과 PDF 파일을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15. 해방의 기쁨을 누립니다!!!

오늘은 치킨 각!!!!!!!!!!!!


















16. 수정 요청이 왔습니다.

  내가 이걸 하느라 삼일을 가자미눈이 됐는데 이걸 대충 쓱 보고 수정하라고 하면 내가 진짜 화가 나는데 요청사항이 맞는 말이라 수정을 합니다. 역시 제삼자의 눈은 정확해요.


17. 다시 가상 음원과 PDF를 만듭니다.

악보_최최종.pdf


18. 아싸 컨펌!!!!!!!!!!!!

  오늘은 진정으로 치킨 먹는 날..!!! 이 아니고 파트보 만드는 날입니다.

연주하느라 손이 바쁜 연주자들이 7마디마다 책장을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자기 파트만 딱 들어있는 파일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악기 열두 종류였으니 열두 개를 만들어야겠네요.

바이올린만 있는 파트보에요


19. 레이아웃을 잡습니다.

  최대한 악기가 길게 쉬는 부분이 페이지의 끝에 배치하도록 편집합니다. 그래야 여유롭게 악보를 넘길 수 있으니까요. 도저히 악보 넘길 각이 안 나오면 B4용지로 편집합니다. 출력할 때 좀 귀찮아지겠지만요.


20. 앗 바이올린에 오타가 있네요.

총보 수정. 연계된 바이올린 파트 보도 수정.


21. 앗 첼로에 오타가 있네요.

총보 수정. 연계된 첼로 파트 보도 수정.


22. 앗 피아노에..

도르마무 도르마무 수정을 하러 왔다.


23. 연주 리허설에 갑니다!

  가상 음원으로 들었던 음악이 어떻게 숨 쉬는 생명체가 되는지 듣는 것은 늘 설레고 짜릿한 일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입니다.

  근데 생음악으로 들어보니 잘못 편곡된 부분들이 귀에 들어옵니다. 이런 악보를 열심히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분들에게 미안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런 쪼랩이 앞에서 베토벤 운운한 거 공식적으로 사과드립니다. 

  

  아니 근데 열 번 스무 번 봤는데 오타가 또 있네요?

  지휘자가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악보에 없던 나타냄 말 빠르기말 같은 게 막 추가됩니다.

  수정 각이네요. 이럴 줄 알고 있긴 했지만 내 눈에선 눈물이 흘러 배신감 느ㄲ..


24. 도르마무 도르마무

  수정을 합니다. 동시에 작곡가는 사실 닥터 스트레인지였다는 썰에 대하여 깊이 고찰해봅니다.






25. 드디어 연주회날입니다!

  전 무대에 서지 않습니다. 심지어 작곡이 아니라 편곡으로 참여했으니,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쌀 일 같은 건 없습니다. 그래도 전 늘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무대에 올라간 연주자에겐 기회가 한번밖에 없는데 저는 작업하는 내내 무한 수정 루프를 탈 수 있으니까요!!

  오늘 무대를 위해 골방에 박혀 준비한 수십 시간은 아마 저만 알고 있겠지만, 빈 오선지에서부터 완성된 음악까지의 진화과정 역시 저만이 알고 있는 짜릿함입니다.

  연주를 듣고 있자니 다음엔 더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스물스물 올라오네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아쉬움을 반가운 친구 삼아 다음 작업을 준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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