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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오니소스 Mar 21. 2022

가난은 왜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을까?

우리 집은 항상 가난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빠는 대기업에 다니고 엄마는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때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면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고, 아빠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고시 공부를 했다.




옷을 사달라고 하면 단 한 번도 "그래"라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수학여행을 갈 때 나이키, 아디다스, 리바이스 옷을 입고 싶었지만 5천 원짜리 티셔츠, 만원 짜리 바지밖에 입을 수 없었다. 많이 창피했다.


아빠는 작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했고, 엄마는 동네의 수학 과외 선생님이었다.

엄마의 귀가가 매일 밤 12시쯤으로 늦었기에, 비교적 일찍 퇴근하는 아빠가 나의 저녁밥을 챙겨준 뒤에, 아파트 상가 지하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에 아빠 손을 잡고 가던 것이 일상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어느 날 저녁, 여느 때처럼 아빠와 지하 슈퍼에 갔다. 엄마가 몇 시쯤 올지 궁금해서 아빠에게 "아빠, 엄마 언제 와?"라고 물었다. 아빠는

"그런 거 사람 많은 데서 물어보지 마. 사람들이 엄마 없는 줄 알아."라고 대답했다.

왠지 모를 창피함을 느꼈다. 아빠는 나보다 더 창피했을까?


우리 집은 대전의 아파트였는데,

첫 입주 이래로 14년 동안 단 한 번도 리모델링은 물론이고 도배도 새로 한 적이 없다. 가구도 바꾼 적이 없다.

키우던 강아지가 소파 가죽을 전부 물어뜯어도 테이프로 얼기설기 붙여 방석을 얹었고, 이갈이를 하느라 목재 TV장 모서리나 식탁 다리, 의자 다리를 전부 갉아먹어도 절대 바꾸는 법이 없었다. 삐걱대는 방문, 벽에 그린 낙서, 먼지가 소복이 앉은 식탁 전등,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난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친구들 집은 아니었다. 친구들 집의 멋진 원목마루를 보면서, 우리 집의 흰색 장판 바닥이 생각나 창피했다.


중학생 시절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집에 있는 식기 얘기가 나왔다.

우리 집은 엄마가 혼수 때 가져온 식기를 최소 20년째 쓰고 있었다. 선물로 받은 싸구려 티스푼, 포크 세트의 도자기로 만든 손잡이가 깨져 반토막이 나고, 35년 된 은 포크가 변색되고 바래도 그냥 썼다. 그래서 친구에게 우리 집 식기는 오래됐단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내 친구 왈,

"아 너희 어머니도 살 때 비싸고 좋은 거 사서 오래 쓰시는구나? 우리 엄마도 그래."

우리 집은 명백히 아니었다. 친구에게 "아닌데?"라는 대답만을 했지만, 우리 집 비루한 커트러리가 생각이 나 창피했다.


나는 수험생 시절 일본의 게이오 대학교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반박할 수 없는 일본의 명문 대학. 합격 발표를 보자마자 할머니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곧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해 "아빠, 나 게이오 합격했어." 하고 엉엉 울었다.

그런데 아빠는 조금도, 정말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어, 그래?"라고 했다. 눈물이 쏙 들어가고, 당황스러웠다. 결국 내 진학 1 지망이었던 게이오 대학교는, 아빠가 200만 원가량의 입학비를 내주지 못해 포기하게 되었다.

고3 시절 담임 선생님은 내가 게이오 대학을 포기했다고 하자, "거기가 일본의 명문대라며, 어떻게든 가야 하는 것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내 잘못도 아니고 아빠 잘못도 아니고, 난 오히려 억울했는데, 애써 웃으며 "돈이 없어서요."라고 말하는 내가 창피했다.


대학교 유학 시절, 그때의 남자 친구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했다.

왜냐고 물어보니,

"나중에 내 애가 우리처럼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는데 못 보내주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아."라고 했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훌쩍이는 정도가 아니라, 숨이 차서 억억대며 펑펑 울었다. 울면서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얼마나 나한테 미안했을까?"




에피소드는 수도 없이 많다. 이 글을 쓰며 당장 생각나는 것만 추려서 적어본 것이다.


어린 시절 가난은 나에게 감정들로 다가왔다.

긍정적 일리 없는, 희망을 갖기에도 벅찬, 평범할 수조차 없는 그런 것들에 대한 결핍.

창피했고, 창피한 이유를 부모님 탓으로 돌렸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듯, 창피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왜 어릴 적 나는 가난이 그렇게도 창피했을까? 그리고 지금도 사실, 그렇게 당당하지는 못하다.


왜일까?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누리지 못해 생긴 나의 교양 부족, 경험 부족에 대한 부끄러움? 그래도 나는 괜찮다고 자기 최면을 걸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는 괴리에 대한 자괴감?


어찌어찌 크다 보니, 운이 좋아 생활 수준은 평범해질 수 있었고, 가난의 대물림은 벗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벗어날 수 없는 '나'에 대한 역사들에게서, 내가 언제쯤 자유로워질지는, 도무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냥, 어릴 적 그 감정들을 평생 꾹꾹 묻어 소화불량으로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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