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sson In Storytelling #2
※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 <배터 콜 사울(Better Call Saul)>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학적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실, 문학을 정의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도 없습니다. 정의된 것에서 벗어나는 게 문학의 특질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된 어떤 것이 문학이라면 그 정의에서 벗어나는 것도 문학이라서, 문학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문학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문학에 대한 완벽한 정의가 없을지언정, 더 좋은 정의와 좋지 않은 정의는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정의는 문학의 꽤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 좋은 정의인 것 같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입니다. 에티카는 윤리학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몰락하는 인물의 윤리학. 이것이 문학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늘 몰락하는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왜 중요한가.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문학은 지면서 이기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부인 하나를 위해 기꺼이 몰락하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예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입니다.
그리스 테베에 라이오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습니다. 곧 그의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아들을 한 명 출산합니다. 라이오스는 신탁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고 부하에게 명령합니다. 부하는 차마 어린아이를 죽이지는 못하고, 아이의 복사뼈에 쇠못을 박고 이웃 나라의 목동에게 그를 넘겨주죠. 그런데 목동은 자신의 나라의 왕에게 아이를 바칩니다. 아이는 발이 부어있었고, 오이디푸스(부은 발)라는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오이디푸스는 이웃 나라의 왕과 왕비를 자신의 친부모로 알고 성장합니다. 그러다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되죠. 자신의 친아버지를 자신이 죽이게 된다니. 오이디푸스는 잔인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나라를 떠납니다. 그는 테베를 여행하던 중 한 노인을 길에서 마주치고 시비가 붙어 그를 죽이게 됩니다.
노인은 자신의 실제 친부인 라이오스였지만 오이디푸스는 이를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는 테베의 골칫거리였던 스핑크스를 죽이고 그곳의 왕이 되죠.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면서 말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무서운 운명을 피하고자 먼 여정을 떠났으나 오히려 그 떠남으로 정확히 운명을 실현하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왜 문학적인 인물인가요? 왜 지면서 이깁니까? 그가 몰락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운명으로부터 부여받은 수동적인 몰락인데 말이죠.
그가 문학적인 인물로 재탄생하는 것은 바로 마지막 순간입니다. 그는 몰락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릅니다. 아버지를 보고도 아버지임을 알지 못했고, 어머니를 보고도 어머니임을 알지 못했으니 그는 원래부터 장님이었던 셈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운명의 뜻대로 몰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몰락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장님이 됩니다.
오이디푸스가 지면서 이기는 이유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순간에도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운명은 오이디푸스를 파괴하지만, 그가 장님이 된 것은 운명의 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죠. '나는 신이 정해놓은 방식대로 살지는 않겠다!' 이것이 스스로 눈을 찌른 행동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문학적인 인물입니다. 가장 오래된 문학적 인물이라고 보아야겠죠. 그렇다면 가장 최신의 문학적 인물은요? 우리는 <브레이킹 배드>와 <배터 콜 사울>에서 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시리즈의 아버지, 빈스 길리건이 탄생시킨 인물들입니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 <배터 콜 사울>의 사울 굿맨. 그들은 오이디푸스의 현대 버전입니다.
월터 화이트는 보잘것없는 고등학교 화학 교사입니다. 비록 지금은 초라하지만, 원래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죠. 칼텍의 화학 박사 출신으로 대단히 성공한 화학기술 기업인 그레이 매터(Gray Matter)의 공동 창립자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는 교사 월급이 모자라서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신세입니다. 거기다 폐암까지 진단받습니다. 그는 끝없이 몰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운명에 발악합니다. 그는 뛰어난 화학지식을 바탕으로 임신한 아내와 뇌성마비에 걸린 아들을 위해 마약을 제조합니다.
그러나 삶은 더 시궁창으로 빠져듭니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지만 그만큼 위험에 빠집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쳐요. 그런데도 그는 계속 마약을 만듭니다. 매우 높은 순도의 마약이 길거리에 풀리자 마약단속국 DEA는 수사망을 좁힙니다. 더불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위협은 더 강해집니다. 월터 화이트는 끝없이 몰락합니다.
월터는 가족과 함께 경찰과 카르텔의 눈을 피하려고 하지만 끝내 그의 가족들마저 그를 떠납니다. 자신은 어차피 폐암으로 죽을 운명. 가족에게 많은 돈을 남기고 최후를 맞이하려던 생각이었는데 일은 꼬이고 꼬여 끝내 모든 것이 파탄 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월터는 자신의 아내를 찾아갑니다. 아내는 월터를 꾸짖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모든 범죄, 그게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고 말하지는 마라. 월터는 차분하고 평온하게 대답합니다.
나를 위해서 그랬어. 좋아했지. 잘했고. 나는 살아있었어.
(I did it for me. I liked it. I was good at it. and I was alive.)
이 순간 월터는 문학적인 인물로 재탄생합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의지로 범죄를 저질렀고, 그것이 정말 좋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몰락을 '선택'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애초부터 그는 가족을 위해서 마약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핑계였죠.
더 깊숙한 마음속엔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있었습니다. 공동 창립자로부터 배신당하고 폐암에 허덕이는 못난 운명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월터는 생각합니다. 나로 돌아가야겠다. 범죄라는 사회의 규칙 따위 잘 모르겠고, 가족이라는 마음의 감옥 따위 잘 모르겠으니, 나는 그냥 내가 되고 싶은 내 모습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마약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빈스 길리건은 월터가 몰락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부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폐암 치료를 위한 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거절합니다. 아내에겐 받았다고 거짓말하죠. 자신이 마약을 유통한 범죄자라는 단서를 슬쩍 흘리기도 합니다.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위태함을 즐깁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그것을 즐겼노라고.
월터 화이트는 몰락을 선택함으로써 가족과 돈,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그가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선택 그 자체입니다. 나 스스로 무언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내 삶은 이대로 운명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느낌. 그에게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배터 콜 사울>의 사울 굿맨 역시 문학적인 인물입니다. 그도 마찬가지로 운명에 저항하면서 몰락합니다. 사울 굿맨의 본명은 제임스 맥길. 그는 <브레이킹 배드>에 등장했던 변호사로 각종 범죄를 뒤에서 돕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배터 콜 사울>은 멀끔한 변호사였던 제임스 맥길이 어떻게 사울 굿맨이라는 범죄 변호사로 타락하는지를 묘사하는 이야기죠.
그에게 내려진 운명은 그가 범죄형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동네 양아치에다 타고난 사기꾼입니다. 반면 그의 형은 매우 유능한 변호사입니다. 모두가 그의 형을 존경하죠. 그는 운명에 저항해보기로 합니다. 밤새워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고 유명한 로펌에 들어가기도 하죠. 그러나 그의 본모습은 변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건이 연쇄적으로 벌어지면서 맥길은 점차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몰락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는 몰락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선택합니다. 사울은 '데이비스&메인'이라는 큰 로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큰 사무실을 배정받습니다. 한쪽 벽면엔 뭔지 모를 스위치가 있습니다. 절대 누르지 말라고 쪽지가 붙어있어요. 그는 그걸 몰래 누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드라마는 그냥 진행됩니다. 왜냐하면 스위치는 상징적인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금기를 깨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는 몰락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배터 콜 사울>은 완결이 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결말이 있다면 그건 사울이 점점 더 몰락할 것이고 그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도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닐 것입니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덕분에 세계는 잠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신형철의 이어지는 문장입니다. 문학적인 인물은 몰락을 선택하면서 그로부터 세계가 파괴할 수 없는 단 하나를 지킵니다. 그리고 질문하게 합니다.
"오이디푸스가 몰락을 선택하지 않고, 신탁을 알았지만 진실을 파헤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냥 찝찝하지만 테베의 왕으로 계속 지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월터 화이트가 몰락을 선택하지 않고, 끝까지 고등학교 화학 교사로 남았다면 어땠을까? 비록 동업자는 잘나가고 자신은 폐암으로 시달리지만, 그냥 가족과 함께 마지막 생을 보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몰락을 선택했습니다. 선택은 운명에 저항하는 발버둥입니다. 나만의 방식대로 살기 위한 몸짓이에요. 운명이 정해놓은 대로 살지 않겠다. 나는 내 삶을 살겠다. 스스로 눈을 찌르고 마약을 만드는 것.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몰락을 선택한 인물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삶의 방식에 정답은 없겠지만, 오이디푸스와 월터 화이트, 사울 굿맨은 같은 대답을 내놓습니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것. 설령 그것이 제 눈을 찌르고 마약을 만들고 각종 범죄에 찌든 삶이더라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 단지 그것만이 진실한 삶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