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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cus Nov 29. 2018

두 가지 롱테이크 : 활동과 감정

A Lesson In Visual-telling #3

A Lesson In Visual-telling #2

두 가지 롱테이크


영화는 알맞은 시간과 공간을 담은 쇼트로 구성됩니다. 영화는 시공간 편집의 예술인 셈입니다. 따라서 영화 창작에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을 겁니다 : 시간을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 공간을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


시간의 편집은 '얼마나 더 오래 보여주는지'와 관련됩니다. 영화의 롱테이크(Long take)는 더 오래 보여주는 기술입니다. 특별한 기준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오래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상대적으로 더 오래 보여주기.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쇼트의 시간보다 더 오래 사물을 비추는 것이죠. 관객은 영화가 앞서 진행해온 편집의 리듬에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편집이 될 것 같은 순간에 카메라는 관객의 예상을 깨뜨립니다. 오래 머무릅니다. 관객은 쇼트가 예상보다 더 길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쇼트가 지속되면 우리의 감각은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챕니다. 나도 모르게 화면에 집중하고 내용에 밀착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롱테이크의 효과입니다.


한편 공간의 편집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와 관련됩니다. 이때 롱테이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화면을 커트하지 않으면서, 카메라를 움직일 것인지 혹은 움직이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죠.


그러면 롱테이크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뉘는군요. 움직이는 롱테이크와 움직이지 않는 롱테이크. 이 두 개의 롱테이크는 시간을 지속시켜 관객을 집중하게 만드는 공통점을 공유하면서, 움직임과 고정이 만드는 각기 다른 효과를 나눠 가집니다.



움직이는 롱테이크


위의 사진을 보고 정보를 파악해봅시다.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일까요?


롱테이크와는 별로 관계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영화라 골라봤습니다. 코엔 형제의 <위대한 레보스키 The Big Lebowski>. 두 명의 남자가 앉아있고 뒤에 다른 한 남자가 앉아있네요. 사진 속 장소는 볼링장 맞습니다. 맥주병도 보이네요.


우리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스크린의 정보 대부분을 읽습니다. 결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죠. 영화에서 화면이 계속 바뀌어야 하는 이유는 관객이 금세 화면의 상황을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롱테이크의 다른 말은 '끊어지지 않는 활동'입니다. 롱테이크이기 때문에 시간이 끊어지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활동이 부각됩니다. 관객은 움직이는 카메라를 따라 정보를 연속해서 읽어냅니다. 이때 좋은 롱테이크는 관객이 소화할 수 있는 템포로 정보를 전달합니다. 알맞은 템포와 리듬으로 움직이는 것이죠. 관객은 정보를 끼워 맞추며 더욱 몰입하게 됩니다. 마치 카메라가 퍼즐을 하나씩 건네주면 관객이 차례로 맞춰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롱테이크는 대개 배경이나 상황을 묘사할 때 유용합니다. 전달할 정보가 많기 때문이죠. 카메라는 배경에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인물을 쫓아갑니다. 관객은 인물과 함께 배경 구석구석을 누빕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입니다. 우리는 박두만 형사의 움직임을 쫓아가면서 잔인한 살인사건이 벌어진 논두렁을 함께 돌아다닙니다. 그로부터 마치 우리가 현장에 있는 것 같은 감상을 받게 됩니다.


한편 롱테이크는 끊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인바, 지금 현장에서는 무심한 경운기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뛰어놀며 꿀 발라 놓은 논두렁에선 사람들이 미끄러집니다. 평범한 시골의 모습이에요. 바로 옆에 시체가 있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죠. 봉준호 감독은 허술한 일상과 끔찍한 시체를 커트 없이 이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롱테이크는 연속적으로 정보를 전달한다고 했었죠. 그래서 관객을 상황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현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한편 역설적인 정보를 차례로 전달하면 관객은 그 역설의 간극만큼 충격을 받습니다. 일상과 시체의 간극 같은 것 말이죠.



오손 웰스의 <악의 손길>에서도 움직이는 롱테이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장면입니다. 알 수 없는 범인의 손에 들린 시한폭탄이 클로즈업되면서 시작합니다. 범인은 차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차는 천천히 사람들 사이로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유독 카메라의 주목을 받는 남녀가 차 옆을 지나가는군요.

 

관객은 과연 이 남녀의 옆에서 폭탄이 폭발할 것인지 계속 지켜보게 됩니다. 차와 남녀는 앞서거나 뒤서면서 관객의 마음을 졸이죠. 연속적인 정보전달을 이렇게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남녀의 옆에서 폭발할 것 같다, 아닐 것 같다. 두 가지 정보를 바꿔가며 제시하는 것입니다. 쌀보리 게임과 비슷하죠.


움직이는 롱테이크의 힘은 활동 그 자체입니다. 활동으로 화면을 계속 바꾸면 관객은 정보를 능동적으로 수용합니다. 살인의 추억과 악의 손길에서 드러나는 롱테이크를 우리는 활동의 롱테이크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롱테이크


그런데 화면이 바뀌지 않으면 어떨까요? 롱테이크를 보면서 관객이 비록 집중은 하겠지만, 해석할 정보를 연속으로 전달해주지 않으면, 즉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으면 관객은 이내 지루해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먼저 화면 위의 정보를 읽어낼 것입니다. 그런데 이쯤이면 화면이 바뀌어야 하는데 바뀌질 않아요. 같거나 거의 비슷한 화면이 지속되면 관객은 처음에 의아함을 느낄 겁니다. 그러나 의아함은 이내 사라지고, 관객은 같은 화면 속에서도 계속 정보를 읽어낼 겁니다. 읽어낼 정보가 없으면 그것을 만들어서라도 말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사과를 본다는 것은 사과를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그림자도 상상해보고 사과에 스며든 햇빛도 상상해보는 것이라고 말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화면을 봅니다. 그런데 화면이 바뀌지 않고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화면 너머에 있는 것을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아실 텐데요.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자세히 오래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군요. 영화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인물을 자세히 오래 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감정을 찾아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롱테이크를 보면서 활동의 정보를 읽어내었듯이, 움직이지 않는 롱테이크를 보면 감정의 정보를 읽어냅니다. 감정(Emotion)은 마음의 활동(Motion)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의 한 장면입니다. 한 소년이 클로즈업되어 있습니다. 앞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습니다. 소년은 모닥불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소년을 그저 계속 보여줄 뿐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지금 그의 감정이 어떨지 상상하게 됩니다. 화면에 눈에 띄는 물질적 활동이 없으니 인물 머릿속의 정신적 활동을 해석하는 것이죠. 장면이 고정되어 지속될수록 우리는 인물에게 연민을 품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애틋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장면 또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이에요. 두 인물이 자전거를 타고 멀리 나아갑니다. 멀리 나아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화면이 넘어가야 하는데요. 카메라는 작아져 거의 보이지 않는 그들을 계속 비춥니다. 감독은 지금 빈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적의 공간에 관객의 감정이 들어찹니다. 지금 멀리 자전거를 함께 타는 그들의 기분을 떠올리면서. 두 인물에게 더욱 감정을 이입하고 그들의 마음을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롱테이크가 등장합니다. 바로 위의 영상과 반대되는 구도를 가지고 있네요. 인물들이 멀리서 점점 다가옵니다. 그러나 드러나는 효과는 거의 비슷합니다. 오랫동안 비춘 공간으로 관객이 스스로 입장하게 만드는 효과 말입니다.


세 인물은 소리꾼입니다. 그들은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노래합니다. 그들이 지금 움직이고 있으니 우리는 먼저 활동에 주목할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가 점차 고조되면서 그들의 활동이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예측 가능해질 때쯤, 우리는 세 인물의 심정을 헤아리기 시작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고 있을지, 이전 장면들까지 보아왔던 여러 정보로 그들의 심정을 유추합니다.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의 롱테이크 장면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 길에서 그 가족이 어떤 비탄 속에서 출발을 했다가 뒤에 점점 흥으로 넘어가고, 그런 흥이 이제 최고조에 달하는데 그냥 탁 잘라서 다음 커트로 간다면, 그러면 너무 급해지는 거지. 어떤 굉장히 강렬한 것으로 몰아왔는데 탁!하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관객들한테 굉장히 부담을 주고, 그러면 이렇게 새김질할 시간을 못 주는 거요.


임권택 감독은 움직이지 않는 롱테이크의 효과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새김질할 시간. 이것은 관객이 인물에 감정을 이입할 시간을 말합니다.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세히 오래 보면 우리는 감정을 느낍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서편제>에서 드러나는 롱테이크를 우리는 감정의 롱테이크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활동과 감정의 롱테이크


활동과 감정의 두 가지 롱테이크. 그런데 다음의 장면은 독특합니다. 활동도 감정도 아닙니다. 바꿔말하면 활동이면서 감정이기도 하지요. 움직이는 롱테이크 속에서도 절절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다들 아실만한 장면이에요.



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입니다.


우리는 다수의 사람이 뒤엉켜 화려한 전투를 벌이는 영화의 장면들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007이나 미션 임파서블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러나 이런 오락 영화들에서 전투 장면은 장식적 쾌감을 목표로 합니다. 제임스 본드와 이단의 감정을 특별히 녹여내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인물의 활동을 지켜볼 뿐, 감독이 영화의 후반부에 마련한 감동적인 장면에 이르러서야 인물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올드보이의 롱테이크는 다릅니다. 패싸움이라는 가장 활동적인 순간에서도 인물의 정서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분명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습니다. 활동의 롱테이크죠. 그런데 중간중간 인물이 쓰러질 때마다 카메라는 가만히 멈추고 그를 지켜봅니다. 감정의 롱테이크입니다. 움직임과 고정이 섞여 있습니다. 카메라는 느립니다. 가끔 멈춥니다. 오대수는 적들로부터 두들겨 맞기도 하고 칼에 찔리기도 합니다. 그가 지쳐 헐떡이는데도 카메라는 편집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계속 이어갑니다.


올드보이의 롱테이크 장면이 파괴력을 갖는 이유는 피로감 때문입니다. 패싸움이라는 활동을 진행하다가 카메라를 멈추고 인물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다시 활동으로 이어졌다가 카메라를 멈추고 또 감정을 지켜봅니다. 피로감은 활동 끝에 느껴지는 지친 감정이죠. 지금 카메라의 움직임은 너무나 섬세하게 인물의 피로감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관객에게 피로감을 전달하기 위해 활동과 감정의 롱테이크가 동시에 사용된 것은 매우 적절한 전략이었던 셈입니다.


<올드보이>의 저 롱테이크 장면, 일명 장도리 씬은 촬영 스케줄이 바빠지자 박찬욱 감독이 급하게 떠올린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원래는 일반적인 편집으로 진행되는 싸움 장면을 촬영하려고 했었다는군요. 아마도 그랬다면 화려한 액션이 부각되기는 했겠지만, 지금처럼 지쳐 쓰러질듯한 오대수를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시공간 편집의 예술입니다. 시간을 얼마나 더 지속할 것인지, 공간을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지가 관객의 정서를 결정합니다. 활동과 감정의 롱테이크는 관객의 정서를 가장 강력하게 뒤흔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올드보이>에서 볼 수 있듯이, 훌륭한 롱테이크는 언제나 활동과 감정,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하면서 움직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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