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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tto Apr 09. 2022

 침묵: 오늘 남편에게 보내는 위로

"여보, 큰일 났어."

"왜?"

"팀장이 다음 주 화요일에 미팅을 하재."

"근데?"

"근데 미팅 참석자에 HR head도 들어가 있어..."

'...'




올 것이 왔구나.

식탁에 앉아 바삐 밀린 원고를 손보고 있던 나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애써 의연한 척 자세를 가다듬었다.

지난 2년간 코로나 여파 속에 무사히 잘 버티고 있다 싶었지만 사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안간힘을 쓰며 직장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




코로나 기간 중에 우리가 이곳 싱가포르에서 외노자(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으로 해외살이를 하는 동안 제법 많은 수의 주변인들이 이곳을 떠났다. 회사의 긴축재정으로 주재원 수를 줄이는 바람에 본사로 돌아가거나, 로컬 회사의 경우에는 해고 통보를 받거나, 자영업자들은 몇 달간 자금 회전이 되지 않아 가게 문을 닫거나 하는 등, 이유는 각양각색이었지만 하나같이 경제적인 이유였다. 




참, 희한하게도 남편이 하는 일이란 경제가 어렵고 시국이 혼란스러울수록 일감이 더 모이는 직업군에 속해있어 우리는 그런 시류에서 역행하고 있었고 코로나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무탈한 2년 반을 보내고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지난달 우리 가족도 역시나 사그라들 줄 모르고 기세를 더욱 부려대는 코로나를 피해 갈 수 없었고 그와 동시에 지난 실적의 압박과도 마주하게 될 모양이었다. 왼쪽 옆구리가 당겨왔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니 우리도 참 여러 변화와 위기의 언덕을 굽이굽이 넘어왔다. 한국에서도 자카르타에서도 이곳 싱가포르에서도 남들보다 더, 덜 혹은 남들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운이 따라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째 오늘은 이 남자의 얼굴에 자신감이 그때의 반의반도 못미처있다. 가장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는 일이란. 아무래도 심상찮아 심호흡을 하고 덩달아 나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남편은 내게 응석받이 네 살 아기처럼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자기에게 어떠한 잔소리도, 충고도 하지 말고 오직 '하트가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달라고 했다. 나는 이 남자가 곧 맞이할 50을 목전에 두고 현재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또 그 위기를 바깥으로 꺼내보이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음을 눈치챘다. 곧 듣게 될지도 모를 어떠한 충격적인 멘트와 상황에서 깨질 멘털을 잘 잡아주기 위해 나는 평소보다 300% 양처 모드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 주 화요일에 어떤 인사팀의 통보를 듣게 될지 몰라 남은 며칠을 매 순간 가시방석, 가시 침대처럼 살고 있을 이 남자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예민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는 이 상황에서 다음 주 화요일까지 남은 며칠을 어떻게 더 잘 보낼 수 있을지. 이제는 예전에 비해 현저히 나이도 먹어버려 과로나 스트레스로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과 함께.




애먹은 나의 옛날 얘기까지 해가며 남편에게 할 수 있는 위로는 다해보았는데 실은 나도 알고 있다.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로지 혼자서 싸워야 할 외로운 싸움이라는 것을. 그저 나는 옆에서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지켜보는 수밖에. 그래서 더 애가 탄다. 하지만 당사자인 본인은 오죽하랴.




평소보다 조금 더 예쁘게 저녁 밥상을 차려주었다. 

잠들기 전엔 조금 더 상냥한 눈빛으로 바라봐주고, 하루에 하나씩 칭찬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백 마디 말은 포기했다. 

섣부른 위로보다는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침묵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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