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을 까요
페루 이키토스에서는 가끔, 아니 꽤 자주 인터넷이 안 될 때가 있다. 짧게는 몇 분부터 길게는 하루종일 와이파이도, 데이터도 터지지 않는다. 속도가 느린 거야 지내다 보면 적응이 된다. 그런데 아예 인터넷을 쓸 수 없다는 건 좀 심각한 문제다.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른다더니, 끊겨보니 알겠더라. 내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인터넷 연결이 필수다.
우선, 나는 밥을 먹으며 꼭 유튜브를 봐야 하는데 이때 인터넷이 필요하다. 또, 설거지나 청소 같은 집안일을 할 때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불러야 하는데 이 때도 인터넷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으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정보검색을 할 때 역시 당연히 인터넷이 필요하다. 노트북으로 전자책을 읽거나 SNS 글 작성을 하는 일도 마찬가지, 인터넷은 필수다. 차근차근 짚어보니 내가 하는 거의 모든 행동에는 인터넷이 필요하다.
잠깐 안 될 때는 기다리면 되지만, 몇 시간 이어질 때가 문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얼 해야 하는가. 생각하다 보니 졸린 것 같다. 잠깐 잠이나 잘까? 싶었다. 아니다. 과연 나는 잠깐만 자고 일어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옛날부터 이상하게 밤이 아닌 낮에 자면 죄책감 같은 것이 생겼다. 밤에 수면의 질이 떨어질 것 같고,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 같고 뭐 그런…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 괜히 나 혼자 낮에는 침대에 눕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렇다면 글을 쓸까. 인터넷이 없어도 문서작성은 가능하지 않은가. 근데 썩 내키지 않는다. 참 희한한 게 글도 쓰고 싶을 때 써야 잘 써진다. 할 게 없다고 앉아서 ‘야, 너 지금부터 글 써’ 한다고 해서 써지지가 않는다. 낮잠도 자기 싫고, 글 쓰는 것도 내키지 않으면 인터넷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때, 냉장고에 있는 마늘이 생각났다. 나는 요리를 할 때마다 그때그때 야채를 다듬어 쓰는 편이다. 그런데 다른 야채는 모르겠는데 마늘 얘는 사람을 참 귀찮게 한다. 양파같이 크기라도 크면 1개 껍질 까는 건 금방이다. 아니면 감자나 당근처럼 감자칼로 슥슥 미는 재미라도 있던가. 그런데 마늘 얘는 크기가 작아서 섬세한 손기술이 필요하다. 알알이 분리도 해줘야 하고, 칼로 꼭지를 따서 물에 불리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그래야 껍질이 쉽게 벗겨져 다듬기가 쉽다. 몇 번 하다 보니 나도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것이다.
왠지 마늘을 다듬고 있으면 어렸을 때 봤던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가 생각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인공 정은이와 경민이가 옥탑방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며 마늘을 다듬는 장면이 잊히지가 않는다. 아무튼 마늘은 요리에 꽤 자주 쓰이지만 그때그때 다듬어 쓰려면 참 귀찮으면서 고마운 존재다.
그렇다면, 그래! 마늘을 다듬어놓자. 어차피 써야 할 마늘이고, 난 지금 인터넷 없이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을 찾아야 한다. 마늘을 까서 통에 가득 채워놓자. 드디어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을 찾은 나는 곧바로 움직였다. 냉장고에 있는 마늘을 모조리 까서 다듬어 통에 가득 담아두니 마음이 아주 든든하다. 이제 요리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고, 시간도 단축되겠지. 하는 김에 당근도 다듬었다. 다 해놓고 보니 참 예쁘다, 녀석들. 시간을 생산적으로 쓴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고, 냉장고에 바로 쓸 수 있는 야채를 손질해 놓은 것이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앞으로도 인터넷이 안 될 땐 냉장고에 있는 야채를 다듬어야겠다. 시간을 내서 하기는 영 귀찮은 일이고,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니 갑작스레 생긴 시간에 해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