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KO한국창작음악제의 함정
오늘날 창작은 자유를 심사하는 구조가 되었다. ARKO 한국창작음악제, 일명 아창제는 그렇게 시작된다. ‘작곡가에게 기회를’, ‘대한민국 청중에게 새로운 선율을’ 선사해 준다고 말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음악은 다시 제도화되고, 창작은 다시 구조화된다. 아창제는 창작을 가능하게 하기보다는 창작을 선별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창제가 사용하는 ‘창작 음악’이라는 용어는 자율성과 실험의 공간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그것은 서구 근대 예술 담론이 부여한 ‘작품 중심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다. 창작은 개인 작곡가가 ‘총보’를 통해 ‘표현’하는 예술로 가정되고, 그 표현은 정해진 편성(관현악 혹은 협주곡), 정해진 시간(15분 내외), 정해진 형식(PDF, mp3, wav)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선정’될 수 있다. 여기서 묻는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총보’ 없이 구성된 음악은 창작이 아닌가. ‘실연’이 먼저 존재하고 이후에 정리된 악보는 창작이 아닌가. ‘즉흥’은 왜 창작이 아니라 실험으로 밀려나는가.
아창제는 양악과 국악으로 부문을 나누고 서로 다른 악단에 연주를 맡긴다. 그러나 이 분리는 음악의 역사를 반영한 분리가 아니라 근대적 분류 체계에 기초한 기획의 산물이다. 이 제도는 전통 음악이 오늘날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를 다루지 않는다. ‘국악’은 여전히 ‘양악’의 그림자처럼 기능하며 마치 서양 음악의 대체재처럼 분류된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작은 철저히 ‘작곡가-지휘자-연주자’라는 서구 음악의 구조를 모방한다. 여기서 국악이 제도의 이름 아래 수행하게 되는 ‘창작’은 사실상 서양 중심 예술 체계의 반복 구조 속에 재배치된 음악일 수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감각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구의 예술관과 평가 체계에 스스로를 맞추는 방식으로 국악이 기획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지영은, 제국주의적 시선이 어떻게 한국 음악학계에까지 스며들어 있는지를 강하게 비판한다.
“서양 제국주의의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의해 전통의 단절과 문화적 독창성이 소실되어 가는 지구상의 수많은 민족·국가에 대해서, 오직 그 음악과 문화가 어떻게 존재해 왔고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를 지극히 ‘객관적’으로 해석할 뿐, 그런 침략이 어떻게 지구상의 다양한 문화적 가치들을 파괴하고 다양한 전통 음악들을 짓밟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 전지영, 『갇힌 존재의 예술, 열린 예술』, 북코리아, 2004, p.48
이러한 제국적 해석 체계는 단지 서구 음악학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오히려 아창제와 같은 제도 안에서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서양식 재현 구조가 반복되며, 국악은 그 내부에서조차 독자적인 감각이나 논리가 아닌 기보화, 형식화, 연출화된 전통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전통이라는 기호를 차용하여 서구 형식 안에 채워 넣는 방식에 가까운 것이다. 이처럼 ‘창작’은 더 이상 자유와 실험의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관현악이라는 편성에 맞춘 정형화된 표현 방식, 정해진 시간과 형식, 제도적으로 안전한 조건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경로는 대부분 서구 음악사와 서양 작곡 교육을 거친 ‘전문가들’에 의해 독점된다.
아창제는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나가 실제로 ‘입장’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블라인드 심사’라는 장치는 공정성을 가장한 선택 방식이지만, 그 이전 단계에서 ‘악보로 제출 가능한 음악’, ‘미디로 구현 가능한 음향’, ‘기존 연주 단체가 연주할 수 있는 난이도’라는 조건이 이미 많은 것을 걸러낸다. 그리하여 아창제는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누구나를 가장한 특정인의 제도적 입장권을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아창제가 자랑하는 창작 음악의 실험은, 결국 제도화된 기획 속에서 반복되는 정형적 실험에 머물렀고, 그 안에서 작곡가들은 점점 예술적 정체성보다 포장력과 기획력을 우선하는 자율성의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청중은 ‘창작’이라는 말로 정당화된 익숙한 감각의 반복에 노출되며, 음악은 ‘새로운 것’이라는 명분으로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것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던 ‘새로운 시도’들 속에서 이제는 새롭다고 이야기되는 것들이 더 이상 새롭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전통 그 자체가 새롭게 여겨지는 상황이다.”
— 전지영, 『갇힌 존재의 예술, 열린 예술』, 북코리아, 2004, p.217
아창제가 걸어온 길은 분명 국악 창작의 물리적 기반을 넓혀 온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작가 정신의 위기를 ‘기획된 실험’으로 숨겨 온 구조였으며, 진정한 의미의 예술적 자율성과 존재적 물음을 상실한 무대였을 수도 있다. 오늘날 ‘국악의 대중화’라는 구호는 더 이상 새로운 희망이라기보다는 관성화된 관행이며, 창작의 피상성과 대중성의 착각을 반복시키는 이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주는 소위 ‘친숙함’이라는 것은 자칫 자본과 상업성에 의해 왜곡된 인간들의 자화상일 수 있으며, (…) 거짓된 친숙함은 다시 우리를 친숙한 것만을 찾게 하고 그에 순응하도록 자신을 길들인다.”
— 전지영, 『갇힌 존재의 예술, 열린 예술』, 북코리아, 2004, p.218
대중성을 추구하는 일은 불가피한 생존의 전략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집착’이 될 때, 즉 예술가가 자기가 만든 음악의 본질보다 청중의 즉각적 반응에 사로잡혀 자기 존재를 지워 나갈 때, 창작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포장된 감각의 상품이 되어 버린다.
결국, 아창제는 질문받아야 한다. 이 제도는 과연 창작의 자유를 증명하는 구조인가, 아니면 자유를 조건화하며 예술가로 하여금 상품성에 길들여진 창작만을 반복하게 만드는 감각의 훈육 장치인가.
“우리는 그것이 가지는 당위성에는 주목했으면서도 그 위험성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대중화 담론의 역기능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임에도, 어쩌면 우리는 너무 무심했을 수도 있고, 그쪽으로 ‘도피’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 전지영, 『갇힌 존재의 예술, 열린 예술』, 북코리아, 2004, p.219
이제는 ‘오늘의 창작이 내일의 전통이 된다’는 낭만적 표어보다, 창작이 과연 지금 이 사회와 예술 안에서 어떤 윤리적, 감각적, 철학적 진실을 품고 있는가를 다시 묻는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예술은 감각을 일깨우는 힘이며, 감각은 자기 내면과 시대를 비추는 예민함이다. 아창제가 더 이상 ‘관성화된 창작의 기획’이 아닌, 실존과 윤리, 시대와 존재에 응답하는 창작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진정한 친숙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