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여덟째 날
굳이 두려움을 맞설 필요가 있을까. 주변에 다른 길이 있나 살폈다. 양쪽으로 말라버린 논이 시야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길은 하나뿐이다. 좀 더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차라리 뒤로 도망치자. 보폭을 줄여 천천히 걸었다. 하얀 것의 정체가 천천히 드러났다.
흰 진돗개였다. 개목걸이는 없었다. 진돗개는 아직까지 나를 보지 못했는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앞으로 갈지 뒤로 갈지 고민했다. 그러다 진돗개는 친숙한 이미지고 얌전해 보여서 계속해서 전진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진돗개는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진돗개의 배 주위로 그을진 그림자가 지어 있었다. 그게 좀 야위어 보였다. 음식을 주고 싶었지만 없었다. 산을 넘기 전에 들개 무리를 만난 걸 생각하면 그냥 지나치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진돗개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만 시선은 나만을 향했다. 어느 정도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가로등 밑에 진돗개가 사라졌다.
하루 종일 걷는 건 힘들기도 하지만 지루하기도 하다. 그래서 지루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미리 강구해야 한다. 내가 선택한 건 음악이다. 지금도 이 새벽에 음악을 듣고 있었다. 심지어 봉고차에게 쫓길 때도 음악은 나와 함께했다. 음악을 듣다 보면 하나의 트랙이 끝나고 그다음 트랙이 시작될 때 침묵의 시간이 생긴다. 그 침묵은 나에게 기다림과 설레는 감정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침묵 속에서 내 발걸음 소리만 들려야 하는데 또 다른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바로 내 뒤에서.
나는 뇌보다 몸의 반사신경으로 움직였다. 주머니에 있던 손전등을 켜고 뒤를 돌아 대상을 비췄다. 새하얀 게 있었다. 아까 그 진돗개였다. 진돗개는 소리 없이 내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쪽 손으로 다리를 지탱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 저리 가세요.”
존댓말을 해버렸다. 겁을 먹어서 소리 지르지도 못했다. 그까짓 개한테. 진돗개는 뒤로 물러났다. 내 말보다 손전등의 빛 때문인 거 같았다. 한참을 비춰 진돗개를 멀리 보냈다. 하지만 손전등으로 안 비추면 다시 내 그림자가 되려고 쫒아 왔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손전등을 비췄다. 이제 사라졌다 싶으면 진돗개는 논으로 내려가 나를 노려보며 계속 쫒아 왔다. 아침해가 뜰 때까지. 주변이 밝아오자 진돗개는 사라졌다. 확실히. 이 날 밤에 있었던 그 무엇보다 가장 공포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조조(朝朝)가 되었지만 안개 때문에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서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거 같았다. 시간은 6시 40분. 연속된 위험에 혹시나 나에게 해코지를 할까 멀리서 동영상을 찍으며 다가갔다. 노란 작업복을 입은 마네킹이었다. 뜬금없이 여기에 왜 있을까 의아했는데 좀 더 걸어가 보니 공사현장이 보였다. 거기에 인부 2명이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 같은 거리에 차들을 통제하려고 그들은 도로변에 서있었다. 별생각 없이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인부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인부들은 안전모를 쓰고 수건 같은 걸로 목을 감싸고 있었는데 얼굴은 반타 블랙으로 색칠해 놓은 거 같았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다. 나도 모르게 인부들의 얼굴을 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쳐다봤다. 너무 노골 적으로. 인부들은 그런 내가 신기한지 아니면 무서운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시선은 따갑게 느껴졌다. 하긴 나는 복면을 쓰고 있었으니.
북이면 마을에 도착했다. 아직도 이른 시간이라 마을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정말 쉬고 싶다. 격렬하고 쉬고 싶다. 주변에 쉴 만한 곳을 찾았다. 눈 앞에 장성 사거리 버스여객터미널이 보였다. 여긴 문이 열려 있겠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문을 밀었다. 다행히 문은 시원하게 열렸다.
터미널 안은 수많은 영화 속 장면을 연상시켰다. 주인공들의 만남과 이별을 하는 8, 90년대 로맨스를. 그리고 최근에 갔다 온 대만에 시골 터미널이 생각났다. 착한 사람들이 가득했던 그곳에서 친구네 할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던 추억이 생각났다. 때마침 터미널 안 카운터에서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구석진 곳에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매점도 있었다. 간단한 아침거리를 찾아봤다. 상품 하나하나에 이름표가 붙여 있었다. ‘원’이라는 단위는 없고 오직 숫자만 적혀 있었다. 나는 단팥빵을 골랐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커피와 율무차 한 잔 씩 뽑았다. 맛을 음미할 만큼 힘은 없었다. 빨리 빈 속을 달래고 잠시 누워있고 싶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