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영어: 내 20대 인생을 되돌아보다

by 호주시골교사

내 인생을 바꾼 영어?

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20대 청춘의 절반을 주경야독하며 호주에서 유학하며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20대 청춘,

내 인생에서 의미있었던 시기이기에 이렇게 장문을 써본다.


먼저 어린시절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래도 아주 산골마을은 아니라 시내에는 5층 작은 아파트가 하나 둘 씩 개발되고 있었는데, 그 아파트 주차장에서 아버지가 첫 차 하얀색 프라이드를 주차하시던 모습과 엄마가 한여름 앞 창이 긴 모자를 쓰고 밭에 일하러 가시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하루는 놀이터에서 놀다가 떨어져 턱을 크게 다친적이 있었는데, 엄마가 소식을 듣고 모자가 날아가는 줄도 모르고 달려오셔서 병원에 가서 바로 수술을 했다. 의사 선생님이 나를 눕히고 턱 부분만 동그랗게 잘린 큰 천을 나에게 덮힌 이후로는 기억이 안난다.

아버지의 근무지가 자주 변경되는 탓에 기억이 안나던 어린시절에 이사를 3번이나 했다. 나의 대부분의 유년시절은 시골 마을의 한 양옥집에서 보냈는데, 심심할 때면 친구와 동네형들의 집 마당앞에서 '~야 놀자' 라고 불러대며 구슬치기, 딱지치기, 비석치기를 하고 여름엔 모기약 뿌리는 트럭뒤를 쫓으며, 겨울엔 뒷산에서 비료포대로 썰매를 타며 보냈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항상 공부를 못했다. 머리가 영특하지도 않았는데 공부에도 흥미가 없었으니 초, 중학교 내내 항상 꼴찌를 맴돌았다. 한번은 친구와 수학을 찍어서 몇점나오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는데 찍어도 점수가 도통 나오질않아 똑같은 번호로 찍다가 선생님한테 걸려 된통 맞은 기억이 난다. 중학교 때 중간, 기말 시험성적이 나올때가 가장 공포의 시간이었다. 매 과목 시간마다 어김없이 내 이름은 불렸고,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종아리, 엉덩이를 무진장 맞아야 했다. 좋은 기억과 배움 없이 중학교를 졸업했고, 기술이라도 배워보자는 심정으로 공업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다.


소위 시골의 '꼴통'들만 모인 학교에서 조용한 성격의 내가 양아치들과 어울리진 못했고 다행히 공부에 관심있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우린 그나마 꼴통중에서 잘해보자는 심정으로 시험 문제들을 달달외워 성적을 잘 맞았고 3학년 말쯤에는 취업도 나가게 되었다. 꽉 찬 버스에서 친구들이 자신들이

배정된 공장으로 하나 둘 씩 내리더니 서울로 배정된 나는 마지막에 내리게 되었다. 아침 숙소에서 5시 30분에 일어나 40분을 걸어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난생처음 서울말 쓰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니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백화점'이라는 말에 들떠 다른 친구들보다 좋은 곳에 걸렸다고 기대했지만 내가 배정된 곳은 백화점 신축공사장이었다. 거대한 공사장 앞에서 출석증을 보여주고 들어서자 곳곳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용접하는 소리, 망치소리, 사다리끄는 소리, 그리고 공사장 가득한 뿌연 먼지들..안전화와 안전모를 지급받고 한 아저씨를 따라다니라는 명령에 사다리와 무거운 장비들을 들고 열심히 따라다녔다.


19년 인생동안 부모님의 보호아래 나만의 보금자리에서 안식하다 처음 대면한 사회는 차가웠고, 냉혹했다. 12월 강추위에도 초새벽부터 나와 일자리를 기다리는 인부들, 그와 대조적으로 비싼 코트를 입고 대기업으로 출근하는 화이트칼라 사람들, 같은 숙소에서 지내던 아저씨들이 고된 노동의 피곤함에도 밤에 아이들에게 전화해 목소리를 들으며 싱글생글 하며 웃던모습들이 너무나도 가슴깊이 느껴졌다. 하루는 같은 곳에서 일하던 젊어보이는 형이 나를 처음보고선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빨리 일 그만두고 대학 가." 라며 화살처럼 쏘아버린 말이 마음에 깊숙히 박혀 한달도 채 안되어 일을 그만뒀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바닥에 누웠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친구들은 다 버텼는데 나만 못버텼다는 패배감, 나는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뭘 했나라는 자괴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과 사회의 냉혹함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3일을 울면서 보내다가 마침내 대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수능을 칠 실력이 안되어 수능성적은 없었지만 내신은 괜찮아 지방 국립학교에 지원해 장학금도 받고 입학했다.


나는 뭔가 하고싶은 것이 없었다. 뭘 하고싶은지 몰랐고 그나마 컴퓨터 자격증이 몇 개 있다는 이유로 컴퓨터 공학과를 전공했다. 수학, 물리, 화학, 영어... 전혀 기초가 안돼있는 나는 어려운 공학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울며 겨자먹기로 공식을 달달외워 시험을 치기도 했고 친구들이 추천해 준 방법인 시험에 '이러이러 하니 C만 주세요' 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대학 1학년때는 다들 학과활동, 술, 동아리 등 때문에 공부에 신경쓰는 학우들이 많이 없었으므로 나는 운이 좋게 학점 3.7을 맞아 장학금도 탔다. 대학에서 학과, 동아리 활동, 과대생활, 술도 많이 마시고 사랑도 하며 너무나도 즐거운 대학 1학년 생활을 보내고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 우연히 대학교 홈페이지에 '토익 500점 이상 뉴질랜드 어학연수 5주' 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이거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지원하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쳤지만 망설여졌다. 사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부끄럽게도, 주어, 목적어, 동사가 한글로 무슨뜻인지 몰랐다. 시중에 있는 초보자용 책도 나에겐 어려워 인터넷으로 왕초보자용 책을 찾아 주문해 주, 동, 목적어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반복해서 읽었고 단어도 이해가 안됐지만 그냥 무작정 쓰고 외웠다. 그러더니 군대 전역후 소위말하는 토익 파랭이를 공부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전역 후 복학 전 아침에는 도서관에서 토익기출문제를 뽑아 무작정 외웠고 밤에는 택배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쳤던 토익시험점수가 185점이 나와 신발사이즈도 안나왔다는 충격에 더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그해 마침내 토익 600점 가까이 맞을 수 있었고 뉴질랜드 5주 어학연수를 지원하여 합격하게 된다.


뉴질랜드 5주동안은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 문화, 언어, 가치관, 사고 ..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과 '다륾'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보고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외국물을 먹고 한국에 돌아오니 뉴질랜드의 5주가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아직 젊고, 외국에서 배우고 경험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한국에서 그냥 남들처럼 학교를 다니자니 아쉬움과 공허함이 컸다. 딱히 하고싶은 게 없던지라 나는 복학하고부터 공부원공부를 준비를 위해 행정학과로 전과하고자 혼자 유령학생처럼 1학년들 수업에 들어가 행정학 수업을 듣곤 했는데, 이대로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청춘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한달 후, 호주 타즈매니아 대학 교환학생 장학금 프로그램의 지원서를 받는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고, 그 때 내 영어실력은 조금 향상 되어 토익 700점이라는 지원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현실의 냉혹함을 경험한 갈지 말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없는 살림에 유학의 기회비용은 공무원 공부를 포기해야함을 의미했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매일 고민을 하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조언을 구했다. 군대를 전역한 후 나는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엉뚱하게도 "인생이 뭐에요?" 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냉혹한 현실을 이미 경험했던 나이기에 아버지에게 기대고 싶었고, 뭘 해야 그렇게 힘들게 안 살아도 되는지 답을 얻고 싶었고, 삶의 목표가 없는 나를 꾸짖고 채찍질해달라는 마음의 표현을 그런식으로 했었다.


결국 외국에 나가서 더 많은 경험을 하고싶다는 말에 아버지는 흔쾌히 승낙하셨고 없는 살림에 비행기값, 생활비 천만원을 선뜻 내주셨다. 그렇게 다음 해, 한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호주 타즈매니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