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가 내리는 저녁

by 안신영



소낙비가 지나가고 이슬비로 변한 바깥을 바라보다 산책이 하고 싶어 문을 나섭니다.

문밖을 나서 골목을 벗어나면 공원의 아래 숲을 바로 만나게 됩니다. 울타리 안에 많은 나무들 중에 키 큰 살구나무 서너 그루가 노랗게 익은 살구를 푸른 잎사귀 사이사이로 숨바꼭질시키듯 매달고 있는 모습을 만납니다. 가끔 감나무를 만나기도 하면서 새파란 풋감들이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살구를 발견하고 나서는 기쁨에 탄성이 나옵니다.


귀한 나무들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반갑습니다.

청미래덩굴, 칡덩굴, 목련나무, 측백나무, 향나무, 소나무등 많은 나무들을 산책길에 만나면서 숲으로 난 길로 들어섭니다. 혹여라도 쉬어갈 사람들을 위해 대여섯 개의 나무의자들이 나무 사이로 난 숲에 쓸쓸한 모습으로 이슬비를 맞고 있습니다.

경사진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는 길은 적당한 운동감이 있어서 좋아합니다. 통나무 계단을 피해 옆의 흙길을 일부러 걷습니다. 숲의 나무 냄새, 흙내음을 깊은숨으로 들이키며 떨어져 쌓인 갖가지 나뭇잎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보기도 합니다.


저 나뭇잎들, 엊그제 출근길에서 장맛비에 우수수 떨어져 길에 흩어진 나뭇잎을 바라보며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그 나뭇잎이 발에 밟히는 아픔이 전해올까 두려워 얼른 발을 옮겨 걷기도 했습니다. 이 숲에도 예외 없이 많은 나뭇잎들이 떨어져 노란색, 초록색, 황 톳 길 위에 무늬 무늬 아롱져 있습니다.

떨어진 나뭇잎을 바라보다 다시 멈춰 서서, 나고 지는 사람의 인연처럼 부대끼며 살다 이기지 못해 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여린 잎으로 태어나 얼마 큼의 햇살을 받아 웃음 지었을까. 몇 줄기의 빗방울을 받아들여 그들 몫의 크기로 자라났으려나. 지나가는 바람결에 몇 번의 입맞춤으로 가녀린 몸을 떨었을까나. 결국은 지난밤 굵은 장맛비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어미 몸에서 떨어져 나간 수많은 나뭇잎들. 마치 세상에 부대끼며 아픔, 슬픔, 외로움을 그렇다고 소리 내지 못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어떤 이의 모습처럼이나 애달프기만 합니다.


숲으로 산책을 나올 때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늘 하던 이어폰도 하지 않습니다. 숲의 호흡을 바로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우거져 하늘도 잘 보이지 않는 나무숲 속이어서인지, 밤도 깊지 않은데 갑자기 "임의 생각"이란 가곡 한 곡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직 어스름 저녁, 마치 저녁연기 솔솔 피어난듯한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의 고즈넉함에 사로잡혔나 봅니다.

장일남 선생님 작곡으로 바리톤 김성길 님이 부른 곡입니다.


"밤은 깊어 삼경인데 임의 생각 절로 나고

바람소리 풍경소리 이내 마음 더욱 설레네

너와 살고 지고 너와 살고 지고

너와 나 더불어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좋아하는 가곡이라 자주 들어서인지 호젓한 오솔길에서 문득 읊조리듯 조용히 불러 봅니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흉을 볼지도 모릅니다. 앙증맞게 작고 예쁜 새들이 이 나무 저 나무로 나폴 나폴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은방울 구르는 소리에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렇듯 혼자 걸을 때엔 새소리도 들려 마음은 더욱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빗방울 머금은 풀잎들이 싱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연보라 자운영이 길가에 목을 길게 뽑고 맞이 하네요. 비가 와서인지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조용한 숲에서 한가로이 걸어보는 저녁 어스름. 이 시간이 참 좋습니다.

*사위질빵 꽃


*photo by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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