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시간

산책

by 안신영


겨우내 언 땅을 녹이며 새 봄을 맞는

노란 영춘화.


저만치 오는 그대를 맞음은

내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눈 마주쳐 그대의 눈가에 웃음을

머물게 함이지.


그윽함으로 이내 꽃등을 켜 불을 밝히네.

성큼 가슴으로 오는 그대여

말하지 않아도 머금은 미소만으로

참 좋은 순간.


한 걸음 다가가 나의 전부, 우주를 품어

두려움과 기쁨으로

그대가 길어 올린 지나간 세월의 무게.


그 큰 가슴에 기대어 미래의 잔에 채워질

마중물이 되고픈 마음 되어.

그대를 마중하는

참 좋은 시간임을 알지.




콜롬비아 원두를 머신에 한 스푼 넣어 커피 한 잔 진하게 내린다.


커피 향이 방안에 가득 퍼져 이미 고소한 커피 향에 취한다. 한 모금씩 음미하면서 커피를 즐긴다.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펼친다.


블로그 음악방에선 바이올린 음악의 샤콘느가 온 방안을 감돈다. 정말 감미롭고 슬픈 음률이다.


평소엔 지고이네르바이젠이 가장 슬프다고 여겼는데 샤콘느가 더없이 슬프다.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아름다운 모든 것을 표현했어."


하시는 시인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에요."


"아니거든!"


"아름다움과 슬픈 것은 상통한다고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왜 슬픔부터 먼저 느꼈냐고 의아해하신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난 뒤에 슬픔을 느껴야 한다고 하신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에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사춘기 때에는 많은 것들이 슬픔으로 다가오잖아요."


그러나 이 논리는 여지없이 박살 나고 만다. 문학인으로서의 자세가 틀렸다고 하시면 나는 할 말을 잃고 마는 것이다.


요즘 문학상들의 소설은 왜 이리도 맥이 없나? 말장난도 심하고, 예쁘게만 쓰였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소설가들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긴 한다.


이야기꾼이 소설가라 한다. 그런데 나는 이야기꾼이 되지 못함을 안다. 농담도 리얼 다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지. 가끔 나 자신이 농담을 던 질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드물다. 그래도 무리들과 이야기는 재미있게 나눌 줄은 안다. 다만 이야기꾼이 되지 못해서지.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소설책을 읽으며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기다림의 열망도 이제는 다스릴 줄 안다. 작가님이 쓰신 소설 가본을 다시 읽으며 목차의 소제목들을 정하면서, 귀에 익은 바이올린 연주에 평화로움을 만끽한다. 전화가 왔다. 양수에서 산책하자고. 이 시간 출발해도 거기 가면 늦을 텐데... 해가 길어지긴 했지만,


마지막 열차를 타고 들어와야 할지도, 강변까지만 오면 택시 타고 들어 와도 되니 떠나보자.


산에서 지내시는 분이라 도시가 갑갑하실 거야.


좋은 산책길을 알아 놓셨다니 기대가 간다.


북한강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공원을 산책하는 시간.


약 4km 정도를 걸으며 시원한 강바람과 이팝나무, 층층나무의 예쁜 꽃을 실컷 구경한다.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까지도 흉내 내보면서 두물머리의 역사를 한눈에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옛날에는 이 곳에 주막들이 많았대. 뗏목을 옮기는 인부들이 술 한잔 걸치고 묵어가는 곳이어서 경제 활동이 융성했던 곳이라고도 볼 수 있지."


옛날에는 그랬던 곳이 세월이 흐르고 문화가 달라지면서 폐허가 되었던 곳을 군에서 어느 기업과 손잡고 공원으로 탈바꿈을 시켰다. 하천의 온갖 쓰레기를 다 치우고 사람들이 산책하고, 가족 나들이하며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가로변엔 이팝나무를 심어 작은 나무에서도 한 껏 쌀밥 같은 흰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주변 경관이 좋아 사진작가들로 많이 오고, 강의 아침엔 물안개가 피어 올라 운치를 더 할 것만 같은 그런 곳이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걷다가 쉬면서 목을 축일만한 예스러운 주막이 없다는 것이다. 포장마차라도 있으면 걷다가 지친 두 다리를 쉬어 주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텐데...


"상수원 보호구역 안에 포장마차가 있다면 오염되잖아요."


"그럼 해운대 바닷가는 오염이 안 되냐? 바다를 정화시키려면 돈이 더 들 텐데..."


술과 담배를 즐기시는 시인의 안타까움을 살짝 느끼면서 해가 기울도록 걸어 본다.


연밭이 있는 세미원엔 배다리를 건너야 해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아직 연잎이 조그맣게 나올 때라서 연꽃이 한창일 때 세미원에 가기로 하고 저녁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긴다.


"마음에 드는 음식이 있을지... 하늘이 보이고 풍경이 괜찮은 곳은 있어."


"그럼 그곳으로 가지요."


파라솔조차 하늘을 가린다고 싫어하시는 선생님.


확 트여 앞의 풍경이 보이고 하늘이 거침없이 보이는 바깥 식탁에 앉아 초여름 밤을 즐긴다.


지난번 한여름 같던 더위에 옷을 가볍게 입고 온 것이 약간 싸늘하기는 하지만 썩 좋은 느낌으로 살갗에 부딪는 바람. 그것이 좋다. 약간의 싸늘함. 평소에 좋아하는 한기.


걱정이 되시는지 재킷을 주겠다고 하셔서 챙겨간 스카프를 숄처럼 두른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을 들려 드리니 원하는 음악 연주가 아니라고 하신다.


다음에 CD로 들려주신다고 하신다.


새싹비빔밥을 먹고, 두부김치와 막걸리를 먹으며 음악 얘기. 새로 끄적거린 시 제목이 상징적이며 좋지만 일기 형식이니 '심벌 리즘'을 심어 다시 써보라 하신다.


"넵. 다시 쓸게요."


그렇게 초여름밤은 음악과 문학으로 따스한 마음이 되어 깊어만 가고 있었다.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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