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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lking Disciple Dec 10. 2019

결국 인생은 이해하는 자의 몫이다

박정윤 - [십이월의 아카시아를 읽으며]

아카시아 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교실에서 배운

과수원 길이란 동요를 통해서였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면 쌩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


지금도 여전히 입가에서

잔잔히 흘러나오는 가사와 멜로디는

여전히 그 시절의 풍경과 추억들이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란 그 정도로 우리의 삶에 큰 지표이자

이정표가 되어간다.


이렇게 아름답고 푸르기만 했던 시절을 뒤로한 채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그렇게 바라던 어른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수없는 도전과 과제 그리고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뜻하지 않는 암초를 만나 순식간에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고

화석이 되어버린 줄 알았던 우리의 유년시절은

회상이라는 촉매제를 통해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수많은 상념들과 억겁의 감정들을

홍수처럼 밀려들게 만들어 감정의 파도 속으로

우리를 빠뜨린다.

이 순간, 깊은 심연으로 침몰하는 우리의 모습 위로

잃어버렸던 시간의 조각들이 거품처럼 아스라이

떠올라 그 푸른 시간들을 바닷속에 가둬버린다.

결국 시간도 잠시 멈춰 쉬어갈 수 있는

완벽한 사각지대가 완성된다.


그토록 마주하길 바랬었던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정경들은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만큼이나

투명하고 찬란하게 영롱한 빛을 펼쳐내며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유년의 모습을 간직한

나와 조우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곳엔 젊은 시절의 부모님,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린 형제들이

전혀 늙지 않은 생기발랄함을 자랑하며

나의 역사를 보여준다.


학교 정문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아파트 단지 옆 길에

언제나 일렬로 서서 나의 등하굣길을

향기롭게 채워준

아카시아 꽃들과 개나리가 문득 떠올랐다.

남자아이였음에도 난 단 한 번도 그 꽃내음들을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았었다.

꿀벌에 쏘일까 일정 간격을 두긴 했지만

짙은 향기 가득한 이 길 위에서

추억을 간직하는 방법을 배웠다.

모든 것들을 선명히 눈에 담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부모님에게 말을 건네고

일기에 적으며 한번 더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넴으로써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또렷이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십이월의 아카시아는

누구나 소환하고픈 푸른 유년의 시절과

수많은 고민과 질문 그리고 고난을 겪으며

세상 속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아픔과 상실 그리고 절망에 당당히 맞선

저자의 치열하지만 인간미를 잃지 않은

투쟁과 성장을 보여주며 우리의 아픔과 상실

그리고 절망의 과정들을 돌아보게 해 준다.


아카시아의 많은 꽃말 중에 가장 사랑받는 꽃말은 아마도 품위, 고귀함, 그리고 깨끗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웠던 그 잔인한 경계에서

저자가 보여준 수많은 감정의 조각들은

때로는 현실처럼, 때로는 환상처럼,

때로는 기적처럼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고통과 좌절이 반복되는 하루라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여전히 사랑을 이야기하고 인연을 소중히 돌아보며 추억을 꺼내놓을 수 있는 저자의 서사는

인생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사람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깊이 반성하고 돌아보게 만든다.


저자의 담담한 어조는 책의 말미에 나오는

밤 기차만큼이나

날카롭지만 고요한 삶의 굴곡을 여실히 보여준다.

밤기차의 여정이 아무리 길지라도

결국 터널의 끝을 통과하여 빛을 맞이하듯이

인생의 여정도 반드시 찾아오게 될

빛 같은 날들이 있지 않을까?


아카시아 한 다발 속에 수십 년의 인생을 담아내고

갈수록 진한 향기를 내는 저자의 서사는

그 어떤 향수보다 짙으며

그 어떤 물길보다 깊다.


이 대단한 책 속의 여정을 끝내고 나니

문득 이해인 시인의 아카시아 꽃이라는 시가

떠올라 다시 한번 내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다.


향기로 숲을 덮으며

흰 노래를 날리는

아카시아꽃


가시 돋친 가슴으로

몸살을 하면서도


꽃잎과 잎새는

그토록 부드럽게 피워냈구나


내가 철이 없어

너무 많이 엎질러 놓은

젊은 날의 그리움이


일제히 숲으로 들어가

꽃이 된 것만 같은

아카시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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