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아침, 서류 작업할 일이 있어 출근 전 양재동 외교센터에 들렀다.
9시 업무 시작인데, 10분 전에 도착하니 벌써 십여 명의 사람들이 문 앞 의자에 줄지어 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의자가 다 차 있어, 나는 뻘쭘하게 출입문 앞에 서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번호표를 뽑고서 미리 준비 해 놓은 신청 서류들을 정리하며 순서를 기다렸다. 띵동 벨소리와 함께 내 순서가 돌아왔다. 준비 서류의 미비 때문인지 앞에 있던 사람은 고개를 갸웃하며 무언가를 다시 작성하러 돌아갔다. 나는 인터넷에서 미리 신청 서류도 뽑아서 작성해 놓았고, 필요한 서류를 어젯밤 모두 준비해 왔기에, 뿌듯하고 당당하게 담당자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신청 서식이 올해 6월에 바뀌었어요. 뒤쪽에 가셔서 다시 작성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서류는 모두 원본으로 가져오셔야 해요."
"....."
"혹시 여기 인터넷 서류 원본으로 뽑을 곳이 있나요?"
"예~ 건물 저쪽 구석에 가면 출력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뻘쭘한 표정으로 창구를 빠져나왔다. 구석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다시 증명 서류를 출력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웬 인증 절차는 이리 많은지... 공인인증서가 없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본인 인증을 위해 휴대폰 인증을 하려니, 무슨 앱을 다시 설치해야 한단다. 앱을 설치하고 나니, 그 앱에 다시 가입을 해야 하는데, 가입을 위해 다시 본인 인증을 거쳐야 했다. 앱을 설치하고 다시 증명서류 출력을 위한 인증 절차를 진행하려니, 시간이 초과되어 다시 처음부터 하란다. 우여곡절 끝에 서류를 출력하고, 다시 번호표를 뽑았다. 대기석으로 돌아오는데 앳된 이십 대 여인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대기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부끄러운 듯이 눈을 피하였다.
"띵동"
벨이 울리고 다시 번호판에 내 번호가 표시되었다. 이번엔 조심스럽게 서류를 제출했다.
“25번 창구에서 수입인지 구입하고 30분 후에 다시 오세요.”
드디어 통과.
25번 창구에 가니, 수입인지는 현금으로만 구입이 가능하다고 하여 오랜만에 지갑을 뒤져 천원짜리를 꺼내어 현금결제를 하였다. 수입인지를 창구에 제출하고 다시 대기실 의자에 앉으려는 찰나 좀 전의 그 앳된 여인이 내 주변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왜 저러지? 난 중년의 유부남인데…’
‘하기사, 소싯적 나도 꽤 인기가 있었지...’
스스로 뿌듯해서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의 착각에 빠져 있는데, 그 아가씨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저...."
"네?"
"혹시...."
얼굴이 괜스레 상기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이 분이 왜 이러시지?'
"저...."
부끄러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보니 마스크 안쪽에 웃음이 피어났다.
"저... 혹시 현금 있으시면, 천 원만 빌려주시겠어요?"
순간, 좀 전에 착각 속에 뿌듯해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뭐라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제가 바로 계좌이체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아니... 뭐... 천원이야 그냥..."
"아니요, 꼭 이체해 드릴게요."
"네... 여기 있습니다."
그녀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네며 그제야 좀 전에 수입인지가 현금으로만 구입 가능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요즘 세상에, 현금만 내라니... 좀 그렇지요?"
민망함을 감추려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려 했으나, 어색한 말투가 금세 표가 나고 말았다.
스마트폰의 뱅킹 앱을 켜고 계좌를 불러달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계좌번호를 불러주었다.
"이 이름 맞으시죠?"
"네..."
내 스마트폰에서도 입금 확인 메시지가 울리며 그녀의 이름이 떴다. 우리는 그렇게 의도치 않게 통성명까지 하게 되었다.
괜한 어색함을 느끼며 나는 복도로 나와 불필요한 전화를 여기저기 하고 있었고, 그 사이 그녀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유유히 사라졌다.
아니, 요즘 시대에 현금으로만 결제하라는 곳이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것도 최첨단 대한민국에서....
얼마 전 일이다.
가족들과 저녁으로 외식을 하고, 그 건물 1층에 제과점이 있어서 케이크를 사러 갔다. 몇 달 전 친구에게 받은 케이크 쿠폰도 있어서 겸사겸사하고 들어갔으나, 안타깝게도 쿠폰 케이크는 품절이고, 다른 것들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하여, 마카롱과 쿠키 등을 풍성하게 담아서 계산대에 섰다.
"쿠폰 케이크보다 500원이 더 나왔습니다. 추가 계산하시겠습니까?"
직원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다행히 주머니에 500원짜리 동전이 있어, 직원에게 건넸다.
"죄송하지만, 저희 매장은 현금 없는 매장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혹시 카드 없으신지요?"
아니 뭐 500원짜리 동전을 그냥 받으면 더 편할 텐데, 굳이 카드를 달라고 하는가?
현금만 받는 관공서와 카드만 받는 제과점.
21세기 대한민국... 이런 아이러니라니...
부끄러운 착각을 상쇄하고자 아이러니를 붙여 글을 쓴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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