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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ing Surgeon Mar 28. 2020

버스 토큰

가난의 추억


버스토큰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노땅"일  가능성이 많다.

"노땅"이라는 말에 익숙하다면 그 역시....

토큰은 조선시대 엽전처럼 가운데 구멍이 뚫린 작은 주화 같은 것인데, 버스를 탈 때 요금 대신 지불하는 것이다. 오늘은 그 토큰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1980년대 초,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여름방학 즈음이었던 것 같다. 방학 내내 그랬듯이, 아침을 먹고 약속이나 한 듯이 동네 꼬마들이 골목에 모여들었다. 구슬치기, 망까기로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놀다가, 한 친구가 신림극장에 새로운 만화가 들어왔다고 보러 가자고 제안을 하였다. 당시에는 개봉관이라는 극장에서만 처음 개봉을 하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아래 단계의 극장으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영화를 상영하였다. 당시 서울 변두리였던 신림동에 살던 우리는 개봉관에 가는 것은 꿈도 못 꾸었고, 신림극장에나 가야 그나마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점심을 각자 집에서 먹고, 버스요금과 영화요금을 들고 명규네 집에 모이기로 하였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당시엔 매우 드문 일이었던 터라, 너무 신나고 흥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극장에 간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신림극장에서 '똘이장군'을 보런 간 것이었으니.....

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엄마에게 이야기를 꺼냈더니, 엄마는 가지 말라고 하였다. 아니, 친구들과 이미 약속이 다 되어 있고 모든 친구들이 가기로 했는데, 나만 빠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극장에 간다고 들떠 있던 마음을 스스로 가라앉히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은 없지만, 당시 신림동 구석에 있는 작은 극장에서 어린이 만화영화 요금은 5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엄마에게는 그 돈이 없었던 것이다. 아들의 기를 꺾지 않으려고 엄마는 지갑을 탈탈 털어 보았으나, 떨어지는 것은 100원짜리 동전 몇 개와 토큰 몇 개뿐이었다. 당시 토큰은 100원이 약간 넘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엄마는 내게 토큰 3개와 100원짜리 동전 3개를 주셨다. 그러면서 극장 매표소에서 돈 대신 토큰도 받을 거라고 하셨다. 당시 초등학생 버스요금은 어른의 반값이어서 토큰 하나로 왕복 차비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나머지 토큰 2개와 300원으로 영화요금을 하면 된다고 하셨다. 동전과 토큰을 받아 들기는 하였으나, 나는 창피했다. 극장 매표소에서 토큰도 받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만약 안 받는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어린 내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올랐다. 창피함에 그냥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친구들에게는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괜찮으니 그냥 들고 가라며 등을 떠미셨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별 일 아닐 수도 있는 일이고, 친구에게 그냥 좀 빌려달라고 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난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도 내 가난함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신림동 구석 골목에 사는 집들이 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를 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 와중에도 주인집과 셋방 사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우리 집은 공동화장실을 쓰는 단칸 셋방살이였다.


난 일단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명규네 집으로 향했다. 친구들 4-5명이 모였다. 명규 엄마는 아이들만 버스 태워 보내는 것이 불안했는지, 각자 차비와 영화요금은 잘 준비하고 왔는지 간단히 점검(?)을 하였다. 나는 부끄럽게 토큰과 동전이 함께 올려진 손을 내밀어 보여드렸다. 명규 엄마는 내 얼굴에서 표현되는 부끄러움을 느끼셨나 보다. "동진아, 안 그래도 내가 토큰이 필요했는데, 네 토큰을 내가 동전으로 바꿔 줄게."

친구들과 친구 엄마 앞에서 이런 상황에 서 있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민망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극장에서 토큰을 내지 않고 동전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화끈하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조금은 식어가는 듯했다.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버스 토큰은 1970년대 사용되기 시작해서 1999년까지 통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9년까지 쓰였을 줄은 몰랐다.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회수권을 사용하였다. 90년대 들어서는 토큰을 사용해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한 동안 토큰에 대한 위의 기억들은 잊고 지냈다. 새삼 버스 토큰을 떠올리니 마음속 가장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돌이켜 보면, 그때의 나만큼 엄마도 그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을 터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은 없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어머니에게는 이 이야기를 꺼내본 적이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함께 웃으며 얘기를 해 보려 한다. 이제는 추억으로 떠 올릴 수 있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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