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포XX로 이사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렇다고 갈 순 없어.”라고 대답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또래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또래 문화'는 대부분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은 놀이터에서 놀고, 등하교를 같이하고도 “있다 놀이터에서 만나자.”가 가능한 아이들. 그 사이에서 우리 집 아이들은 한 발짝 멀리 있다.
“왜 우리 집은 포XX가 아니야??”
입학하고 얼마 후 둘째가 한 말이었다. 원래도 작은 학교였지만, 아파트가 들어서면서부터 그 아파트 중심인 학교가 된 느낌이 들었다. 후문이 가까운 우리 집은 이쪽으로 등, 하교하는 아이들이 몇 없다. 조잘거리면서 같이 나오고, 운동장에서 같이 놀자 하기엔 우리 집 아이들은 소심하다. 몇 번 친구들을 초대해도 자주 마주치지 않으니 자연 가까이 지내는 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단지 우리가 사는 집이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웃사이더가 됐다.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니니 아파트 커뮤니티 같은 것이 없다. 놀이터도 없고, 빌라 입구엔 보도블록으로 빠져나온 지렁이나 곰벌레도 많이 보인다. 외풍도 있고, 방마다 온기가 고르지 못해서 겨울이 되면 조끼를 껴입어야 한다. 비가 오면 화단이 있는 보도블록은 쉽게 물바다가 돼서 장화를 신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자전거나 조깅은 꿈같은 이야기이고 우리는 자전거 한번 타려면 차에 싣고 근처 운동장을 찾거나 광장을 가야 하고, 줄넘기 연습 한번 하기 어렵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남편은 자신의 이 집이 너무나도 좋다고 이사 갈 생각이 아예 없다고 단언했다. 귀가 시간마다 주차자리를 찾는 일도 수고스럽고, 많은 사람들을 부딪히는 엘리베이터도, 무엇보다 좁은 평수대비 아파트 가격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린 이사 안 가?”
아이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솔직히 말한다. “엄마도 가고 싶다.”라고.
엘리베이터가 있고, 층간 소음이 걱정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 편리한 주차장과 단지 내 놀이터가 있는 그 ‘기본값’의 삶. 무엇보다 아이들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그 세계에 우리도 함께 들어가고 싶다.
아파트에 살지 않아서 느끼는 슬픔은 확실히 있다.
하지만 이 집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제 와서 다시 아파트라는 '틀 안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아파트에 살지 않아서 느끼는 슬픔은 부끄러움은 아니다.
아파트가 아니어서 생긴 거리감과 불편함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사를 간다는 것은 좀 우습다고 느낀다. 어쩌면 ‘아파트에 살지 않아 느끼는 슬픔’은 우리가 더 나은 삶을 바라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부끄러운 마음은 아니다.
좋은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 인정한다.
편한 환경, 넓은 공간, 단지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관계들… 그런 걸 바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집을 부정하거나 숨기고 싶은 건 아니다.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 삶을 특별히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더 높이는 것도 아니다. 명품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명품이란 보장이 없는 것처럼.
그저 조건일 뿐이다.
그게 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