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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르페디엠 Mar 06. 2022

눈보라 치는 22년 2월 한라산 등반

나홀로 겨울왕국 스토리

어젯밤 제주도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그린 게스트하우스(싱글 스토리) 1인실에서 숙박했다. 제주에서 렌트가 아닌 버스로 이동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역시 남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는 건 나름대로 즐겁다. 공항 근처 게하는 처음 가보는지라(원래 다 이런가?) 숙소 근처 골목이 어둑어둑하고 좀 음침해서 무서웠다. 숙소의 장점으로는 1층 남자 공용 화장실이자 욕실은 널찍하고 뜨거운 물이 아주 잘 나와서 씻기에 좋았다. 그리고 새벽에 물/오메기떡(맛있다)/김밥(진짜 맛있다)을 챙겨주시고 성판악과 관음사까지 전용 셔틀버스로 데려다주시는 서비스가 일품이어서 한라산행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그린 게하는 최고의 선택지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자부한다. 하나 개인적인 단점을 꼽자면, 내 방에서 꿉꿉한 냄새가 꽤 심하게 나서 입장하자마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해가 들지 않는 방의 퀴퀴한 냄새…(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였다ㅠㅠ) 해가 잘 드는 방이나 그린 게스트하우스 본점은 좀 낫지 않을까? 다음에는 본점을 이용해 보고 싶다. 여하튼 복귀 전날도 여기에 예약하려다가 예약이 이미 차서 하지 못했는데 다행이다 싶은 정도였다. 뭐, 그래도 1인실 1박 4만 원에 버스와 조식 서비스까지 제공하시는 걸 고려하면 합리적 아니 킹리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5시에 기상해서 폰을 보니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산행이 가능하고 백록담은 통제 중이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혹시 통제가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는 어제 미리 사둔 백종원 도시락을 데워 먹고, 한라산으로 출발했다. 가는 버스에서 게하 사장님이 지금 한라산 직원이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올라가서 보고 백록담 통제가 풀릴지 말지 결정된다고 알려주셨다. 한라산 직원 중 산을 겁나 잘 타는 분이 계시겠구나, 흥미롭고 신기했다. 역시 세상이 잘 돌아가려면 많은 재능을 가진 이들이 필요한 것이다.


도착 후 등산 스틱을 결합하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했다. 생긴 것이 야무지고 성능이 탁월해서 이 아이템들만 있으면 어떠한 설산이라도 정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대여 서비스를 이용할까 했지만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뚜벅&버스인지라 반납이 번거로운 관계로 그냥 구매해버렸다. 쿠팡에서 세트로 샀는데 성능이 정말 만족스럽다(로켓 배송 없이 못 살아. 알럽 쿠팡!). 저번에는 6시 즈음 성판악에 도착해서 랜턴 없이 산행이 불가했는데 오늘은 7시 좀 넘어서 도착하니 이미 해가 떠있어서 랜턴이 필요 없었다. 한라산은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고 눈앞에 무채색의 세상이 펼쳐졌다. 밤새 내려 어린아이 키만큼 쌓인 눈과 그 눈을 옷으로 입고 있는 거무튀튀한 겨울나무… 허벅지에 기분 좋게 느껴지는 중력의 무게와 어깨 위 배낭의 묵직한 느낌까지.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설산을 탄다는 건 마치 정신에 관장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집과 회사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고민거리와 미처 다 알아차리지도 못한 일상적 욕망들, 끊임없는 생각과 쉼 없이 돌아가던 나날들로부터 훌쩍 도망쳐서, 아름다운 자연과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관장 후에 속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산행 후에는 몸과 마음이 리셋되고, 산행을 무사히 끝마친 후에는 복귀 후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있다고 굳게 믿는 나에게 산행은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취미다.


올라오는 길에 마주쳤던 씩씩한 초등학생과 서로를 배려하던 모습이 아름다웠던 중년 부부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바라는 우리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현실에서 마주할 때 감동하곤 한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에는 정말 더 다양한 일들이 많다는 것들을 깨닫고, 깊어진 지식과 경험만큼 앞으로 펼쳐질 삶도 더 궁금해지고 기대가 된다는 게 신기하다. 어릴 때는 늙어가는 게 싫을 줄만 알았는데 말이다.

아이젠과 스패츠, 그리고 사라오름의 겨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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