슨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예전 슬램덩크라는 농구 만화가 있었다.
90년대 초반에 나온 만화로 일본 작가 '다케이코 이노우에'의 작품이었는데 고등학교 농구부 얘기를 재미와 감동을 섞어 그려내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 당시 국내 농구 리그였던 농구대잔치로 인해 전국적으로 엄청난 농구 붐이 일었는데 당시 농구대잔치엔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우지원 등의 연세대와 현주엽, 전희철, 김병철 등의 고려대에 허재, 강동희, 김유택(일명 허동택 트리오)의 기아자동차 같은 실업팀이 연일 멋진 승부를 만들어내며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다. 특히나 대학생 선수들은 여느 연예인보다도 인기가 많아 경기가 열리는 날은 이들을 보러 오는 여학생 팬들로 경기장이 꽉 차 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농구의 인기로 MBC에선 '마지막 승부'라는 스포츠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고 당시 국민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었던 나는 농구라는 스포츠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고 언젠가부터 그 재미에 푹 빠져 버렸다.
처음 농구공을 잡아본 건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나와 4살 차이가 나는 큰형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농구공을 하나 샀는데 13살 국민학생의 손에는 너무 컸던 그 공을 가지고 친구들과 주말에 인근 중학교 운동장을 찾았던 것이다.
누구 하나 농구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슬램덩크라는 만화와 당시 미국 프로농구(NBA)를 주름잡던 여러 스타플레이어(마이클 조던, 레지 밀러, 그랜트 힐, 숀 캠프 등)들의 동작을 따라 하며 하나하나 기술을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팔에 힘이 없어 한 손으로 슛도 제대로 던지지 못하던 내가 중3이 되었을 때쯤엔 풀업 점퍼도 던지고 엉성하게나마 더블클러치까지 구사하는 수준에 이르게 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친구들과 가장 재미있게 농구를 했던 시기였다.
특히나 중3 겨울방학 땐 동네 친구들과 매일같이 아침부터 농구를 하러 갔는데 오전 9시쯤 시작해 점심시간까지 농구를 하고 근처에 있던 분식집에서 라면이나 햄버거를 먹곤 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분식집 이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700냥 하우스.
이름 그대로 가게 대부분의 메뉴가 700원이어서 인당 2천 원만 있으면 정말 배부르게 이것저것 먹을 수 있는, 우리에겐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하지만 아직도 그 가격에 팔아서 남는 게 있었는지 의문이다.)
항상 5~6명이 우르르 몰려가 메뉴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허겁지겁 먹어대던 우리들. 한창 먹을 나이에 운동까지 하고 왔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그릇 바닥까지 핥아먹을 기세로 거하게 먹고 나와 농구공을 튕기며 집으로 돌아가던 우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 멤버를 소개합니다.
우리도 나름 개인별로 포지션이 있었다.
1번(포인트가드)은 김 선생이었다. 허연 피부에 옥수수 같은 외모로 슛은 없지만 달리는 거 하나만큼은 최고였던 김 선생. 이 녀석이 어쩌다 슛을 넣는 날이면 모두가 놀라움의 박수를 치곤 했다.
2번(슈팅가드)은 우리의 마스코트 똥귀. 똥귀는 슛 폼은 좋은데 기복이 너무 심했고 점프력이 좋음에도 매번 얼토당토않은 더블클러치로 팀 사기를 급격히 다운시키곤 했다.
3번(스몰포워드)은 내가 맡았는데 그 와중에 팀 스코어러로 우리 팀 득점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이는 분명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4번(파워포워드)은 아프리칸 불스 양원장과 썰레옹 두 녀석이었다. 시커먼 얼굴에 큰 키, 하지만 그에 한 참 못 미치는 한 뼘도 안 되는 미약한 점프력의 소유자였지만 정말 희한하게도 시합 중 리바운드는 제법 따내던 마성의 소유자 양원장.
육중한 체구,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몸싸움을 전혀 못하고 남자임에도 투 핸드 슛을 쏘던 썰레옹. 우리의 고민은 항상 공격력이 제로였던 이 4번 자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번(센터)은 고릴라.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만 해도 내가 더 컸는데 한 살 한 살 먹어갈 때마다 키가 무럭무럭 자라더니 고1이 될 때쯤엔 180을 넘겨버린 녀석. 큰 키만큼 팔도 긴 데다 왼손잡이여서 상대팀이 막기에는 조금 까다로운 점이 있었다.
이렇게 오합지졸 6명이 하나로 뭉쳐 그 중요하다는 중3 겨울방학을 우리만의 뜨거운 농구 시즌으로 물들였다.
한 게임하실래요?
매일 아침 농구를 하러 가면 일단 우리끼리 몸을 풀었다. 추운 날씨라 손이 얼어있기 때문에 슛을 던지면서 손을 녹이거나 가볍게 친구들과 1대 1을 하면서 워밍업을 했다. 그리고 몸이 어느 정도 풀렸다 싶으면 팀으로 온 사람들에게 가서 "한 게임하실래요?" 하며 시합을 걸었다. 대부분 전/후반 10점씩, 총 20점 내기로 시합을 했는데 내 기억으론 승률이 50%는 확실히 넘었던 것 같다.
매일같이 농구를 하러 갔던 터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안면을 트게 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우리보다 1살 더 많았던, 아마도 우리와 가장 많은 시합을 했을 형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팀은 일단 피지컬부터 우리보다 훨씬 우월했다. 에이스였던 '에어' 형(팔에 에어조던 아대를 하고 있었다.)도 키가 180 정도 됐고 센터를 보던 형은 185 정도 됐던 거 같은데 이 팀은 우리와 뭔가 상성이 맞지 않았는지 다른 팀들은 곧 잘 이기면서도 희한하게 우리와 붙으면 매번 진흙탕 싸움이 되곤 했다. 조금 친해지고 나서 물어봤더니 우리랑 하면 뭔가 제 실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본인들도 이상하다고 했는데 우리도 그 점은 크게 부정할 수 없었다.
분명 우리보다 훨씬 잘하는 팀이었는데 우리 페이스에 말렸던 건지 확실히 우리가 이기는 경기가 더 많았다.
이렇게 오전 내내 친구들과 한겨울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농구를 했다. 한 게임 뛰고 힘들어서 쉬다가 땀이 다 말라 추워진다 싶으면 또 한 게임.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서 오전 3시간 정도를 원 없이 뛰고선 친구들과 니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하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여전히 농구가 좋지만
내 인생에서 중3 겨울방학 때만큼 농구를 많이 했던 시기는 없었다. 물론 고등학교나 대학교, 그리고 군대에서도 농구를 하긴 했지만 그때처럼 매일같이 했던 건 아니니까. 그리고 생각해 보면 농구를 하다가 많이 다치기도 했었다. 손가락이나 발목을 삐는 건 예삿일이었고 한 번은 점프를 하고 내려오다 친구 머리통에 턱을 찧는 바람에 혀 양쪽이 이빨에 세게 물려 잔뜩 찢어지기도 했었다. 순간 혀가 잘려나간 줄 알고 깜짝 놀랐었는데 다행히 며칠 통원치료를 받고 회복됐다. 물론 엄마의 등짝 스매싱을 피할 순 없었지만.
그랬던 내가 10여 년 전부턴 농구공을 잡아본 적이 거의 없다. 중학교 때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결국 10여 년 전 허리 디스크가 터져 급하게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이후론 허리에 충격이 가는 게 무서워 점프를 해야 하는 운동은 피하고 있다. 여전히 농구가 좋지만 아무래도 몸이 먼저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다 얼마 전부터 종종 집 앞에 있는 농구코트에 가서 슛을 던져 보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폼도 엉성하고 영점도 안 맞아 여기저기로 튀는 공을 잡으러 다니느라 바쁘다. 역시 무엇이든 꾸준함이 최고다.
내 오랜 친구들
갑자기 농구 얘기를 하게 된 건 얼마 전부터 우연히 보게 된 '가비지 타임'이라는 웹툰의 영향이 컸다. 6명의 선수가 전부인 고등학교 농구부 얘기인데 이걸 보고 있으려니 예전 친구들과 미친 듯이 농구를 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모두들 승부욕은 강해서 실력이 떨어짐에도 어떻게든 이겨보겠다고 이를 악물고 뛰던 그때의 모습이, 시합 후 분식집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대던 모습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뭐가 그리 재미나는지 친구들과 껄껄 웃으며 얘길 나누던 모습이 생각났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농구도 분명 재미있긴 했지만 그때의 우리가 그렇게나 농구에 몰두했던 건 그 이후 25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는 이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이 그 당시의 내겐 그리고 우리에겐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25년이 지나버린 지금, 그 시간들은 서로의 기억 속에 조금씩은 엇박자를 내는 추억으로 남아 여전히 지금 우리의 시간을 웃음으로 채워주고 있다.
비가 와서일까? 오늘따라 문득 그때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