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선인장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게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 속상했던 마음들까지도
웃는 모습이 비출때까지 소리 없이 머금고 있을게
에피톤프로젝트 [선인장] 중
상우의 장례식장을 찾은 건 발인 전날 늦은 밤이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영정사진 속 상우를 보면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될 테니까. 나는 아직 널 보낼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장례식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던 순간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갔고 상우와 마지막 인사는 어떻게 나눴는지. 생각나는 건 그저 가는 길에 많이 울었고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것.
하지만 한 가지, 이것만은 확실하게 생각난다.
그 늦은 밤까지 장례식장에 남아있던, 함께 여행을 갔던 상우 친구들에게 했던 말.
"왜.. 왜 상우만.. 같이 갔으면 같이 와야지. 왜 너네만 온 건데.."
그때의 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겨우 1년 넘게 함께 했던 연인을 잃은 슬픔에 가려져 10여 년을 함께 한 소중한 친구를 잃은 그들의 마음을. 그 차가운 강물에 친구를 혼자 남겨두고 와야 했던 그들의 슬픔과 죄책감을.
그림자
모든 게 그대로인 일상에 거짓말처럼 상우만 사라졌다.
아침마다 날 깨워주던 그 애의 전화, 내 하루를 챙겨주던 그 애의 다정한 목소리, 하루의 끝을 함께 마무리하던 따뜻했던 말들. 사진 속에도, 영상 속에도 이렇게 생생한 네가 내 곁에만 없다.
네 숨결이 느껴지지 않고 너의 체온이, 유난히 따뜻했던 너의 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너는 어디에 있는 걸까. 얼마 후에 내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나 미안하다고, 나 몰래 잠시 어딜 좀 다녀왔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그럼 난 잠깐 화를 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너의 따뜻한 손을 맞잡을 텐데.
한 동안 그 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난 많이도 방황했다. 학교도 가지 않은 채 매일 좁은 방 안에서 상우와의 지난 시간들을 붙잡고 있었다. 마치 이곳을 벗어나면 그와의 기억들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듯. 방 안에서 상우와 함께 찍은 사진, 주고받은 선물과 편지들을 보며 울고 또 울었다.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을, 마지막 인사도 없이 날 떠나버린 사람을 어떻게 보내줘야 하는지 그때의 난 알지 못했다.
딱 한 번만 더 상우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가 안된다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럼 그와의 마지막을 잘 준비해서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고 미련 없이 보내줄 수 있을 텐데.
연애가 처음이었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떠나보내고 할 수 있는 애도는 그렇게 방안에 처박혀 그와의 시간을 추억하는 것뿐이었다.
일상으로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계절은 뜨거운 여름에서 어느새 아침저녁으론 쌀쌀함이 느껴지는 가을이 됐다.
그제야 상우의 빈자리가 조금 익숙해졌고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하루는 엉망이 됐고 불면증으로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아침, 점심, 저녁의 경계마저 사라져 버린 날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다. 언제까지 이별의 그늘 속에 묻혀있을 순 없으니까. 상우도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진 않겠지.
하지만 당장은 학교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학교에 가면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생각나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이제 스물한 살의 학생이 학교를 벗어나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르바이트뿐이었고 고민하다 몸 쓰는 일을 찾았다. 몸이 힘들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거고 아마 집에 와서도 피곤함에 금세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지내다 보면 분명 상우와의 시간에서도 조금씩 멀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언젠가 상우를 생각하며 '그땐 그랬지' 하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아르바이트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곳은 인터넷 서점 물류센터로 하는 일은 고객들이 주문한 책을 찾아 포장해서 택배차에 실어주는 작업이었다. 나 말고도 센터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이 많았는데 첫날 일하는 법을 배워보니 생각보다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하루 종일 몸 쓰는 일을 하다 보면 딴생각할 겨를 없이 시간이 가고 집에 가서도 쉬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일이다 싶었고 그렇게 별생각 없이 시작했던 아르바이트는 1년 넘게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담당 업무도 바뀌었다. 처음 1년은 물류직으로 책을 찾아 포장하는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사무식으로 일하던 직원이 갑작스레 퇴사를 하게 되면서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이력서에 있던 'K대학교 언론홍보학과 휴학 중'이란 학력이 그 이유였다. 어느 날 센터장이 나와 면담을 하자했고 사무직 직원의 퇴사로 인한 인원공백을 얘기하며 내게 권했다. 물류센터라 방학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직원들이 많은데 나처럼 1년 가까이 일하는 사람이 드물기도 하고 물류직으로 일하기엔 학벌이 아깝다며 사무직으로 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난 센터장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처음과 다르게 일이 익숙해지며 일하는 시간 틈틈이 조금씩 딴생각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생각들이라 함은 대부분 상우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업무가 바뀌면 또 적응기가 필요하기에 이런 생각들을 잠시나마 묻어 둘 수 있겠지. 나에겐 몰두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