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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Oct 18. 2019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출근길 지하철에서 앉아가는 법

지하철은 양반들의 전쟁터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곳에서 고상한 승자가 되고자 한다. 자리 따위에는 욕심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들어서서 여유로움을 드러내며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거나 스마트폰을 꺼내 세계정세를 살피. 그러다 앞에 빈자리가 나면 이런 행운이 다 있나, 하며 천천히 앉아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편안하게 책을 읽으면 된다. 이따금 내리는 사람들을 밀치며 허겁지겁 뛰어들어서거나, 빈자리가 생길 때마다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자들이 있으면 경망스럽구먼! 하며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체통을 지키 것을 잊지 말자.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지하철역에서 타느냐 여부다. 어찌 보면 뒤에서 서술할 그 모든 것들보다 승부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할지 모른다. 금수저로 태어난 자들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풍족한 조건에서 삶을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음, 씁쓸하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앉을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이사를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억울하긴 해도 어쩔 수 없다. 탑승하는 지하철역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취급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모든 싸움의 시작은 자리를 잡는 것에서 시작한다. 출근시간 지하철 역시 마찬가지인데 승강장에서 몇 번 칸, 몇 번 출구 앞에 서느냐는 내 인생 중 앞으로의 30분을 어떻게 보내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 중 하나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실용을 중시하는 자들로 환승이 용이하거나 내렸을 때 계단이 앞에 있는 곳을 선호한다. 이 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마인드의 미래지향적인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냥 지각 위기에 처한 것이다. 둘째는 눈 앞의 현실만을 믿는 자들로 사람이 적게 서있는 칸을 택하는 직관적인 선택을 한다. 간혹 매의 눈으로 달리는 지하철을 스캔하며 빈자리를 따라 함께 승강장을 달리기도 한다. 반드시 앉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일수록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승률은 그리 높지 못할 수 있다. 셋째는 경험에 의존하는 자들로 다년간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목적지로 출퇴근을 한 베테랑들이 보통 여기에 속한다. 당장 눈 앞에 자리가 없는 것 같더라도 어느 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지, 앉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를 통계적으로 계산하고 감각적으로 움직인다.


이제 지하철 문이 열렸다. 전략이 전쟁의 종합적인 준비, 계획, 운용의 방책을 뜻한다면 전술은 각 전투 실시의 방책을 의미한다. 승강장에서의 자리선정이 큰 그림에서의 전략이라면, 지하철에 탄 이후의 자리 선정은 코 앞에 닥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즉, 아무리 승강장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했다 하더라도 잘못된 전술을 펼친다면 끝까지 서서 갈 수밖에 없는 반면, 우매한 전략 하에서도 이를 일시에 역전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지하철 내에서의 자리 선정이다.




직장인 대부분은 본인의 퇴근시간을 장담하지 못한다. 퇴근시간 직전에 상사가 업무를 가져다주거나 거래처로부터 피할 수 없는 전화가 오는 경우는 물론이고, '번개'의 탈을 쓴 반강제적 회식에 끌려가야 할 수도 있고, 퇴근하는 사람들이 몰려 엘리베이터에서 허송세월을 보낼 수도 있으며, 기껏 지하철역까지 잘 왔건만 사람이 많아 지하철 몇 대를 눈 앞에서 보내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아침 루틴은 각자 나름대로 일정하다. 바꿔 말하면 오늘 아침 7시 8분, 2호선 외선순환 지하철 8번 칸에서 만난 사람들을 내일 똑같이 만날 확률은 절반 이상이다. 이를 활용한다면 내가 아침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확률은 상당히 높일 수 있다.


지하철에 탄 뒤 바로 다음 역이나 다다음 역에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자. 지금 내가 그 빈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당장 며칠을 희생하더라도 더 큰 이익을 생각하자. 그의 얼굴을 외워야 한다. 그것이 힘들다면 가방이나 가슴팍에 달린 회사 배지를 외우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나는 네 명을 외우고 있는데 두 명은 내가 탄 지하철역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리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다음 역, 나머지 한 사람은 네 정거장 뒤에서 내린다. 아침에 지하철에 타면 이 중 적어도 두 명 이상은 만날 수 있다. 슬며시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익숙한 얼굴을 찾지 못했거나, 그들의 앞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을 때다. 우선 빠르게 앉아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자. 커다란 가방을 안고 다른 손에는 영어 단어집을 들고 잠든 20대. 트레이닝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학원에 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강남역 즈음에나 가야 내리겠지, 탈락.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30대. 캐주얼한 복장이지만 노트북에 서류까지 한 뭉치 들어있는 가방이 보인다. 스타트업이나 IT기업에 다니는 사람일까, 그렇다면 몇 정거장 뒤인 구로디지털역에 내리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테헤란로까지 갈 가능성이 높다. 모 아니면 도, 위험한 배팅이다. 보류. 시험공부를 하는 듯 손에 출력물을 들고 달달 외우고 있는 대학생. 과 점퍼를 입고 있다. 시선을 어깨로 돌리니 대학교 마크가 보인다. 중앙대, 중앙대면 7호선이고 대림에서 내려서 갈아탈 가능성이 높다. 바로 여기다, 결정! 가끔 예상에 실패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추론을 해보는 것은 자리 확보 역량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니, 꾸준히 연습해보자.


사실 조금 더 확실한 방법은 앉은 사람들의 신호를 캐치하는 것이다. 갑자기 가방 앞주머니를 열고 교통카드를 꺼내 든다거나, 휴대폰 통화를 하며 "나 거의 다 왔어, 금방 갈게!"라고 말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주의사항은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우릴 속일 생각으로 하는 행동은 아니겠지만, 종종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갑자기 자다 깨서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어느 역인지를 확인하는 행동이다. 이 경우 곧 내릴 때가 되었구나,라고 보일 수 있으나 이 행동을 한 사람이 곧 내릴 확률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나는 매 역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어느 역인지 확인하는 행동을 20분이나 하던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보던 책을 접어 가방에 넣던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행동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이 경우는 그 후속 동작을 잘 살펴야 하는데, 팔짱을 끼고 눈을 감거나 하면 곧바로 내릴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멀뚱-히 앉아있거나 다른 특별한 후속 동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곧 내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 역시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패턴을 익히고 감각을 키울 수 있으니 정진하도록 하자.


굳이 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 하루를 시작하는 소소한 게임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어차피 회사에 가면 이래저래 시달리고 피곤한 일이 가득일 텐데, 조금의 시간을 들여 즐길거리를 찾고 그 포상으로 잠깐이지만 편안한 휴식도 얻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도전이 아닐까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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