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여느 아이들과 달리 만화책도, 게임도, 축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도 보지 않았을 정도로 만화책에 관심이 없었다. 무슨 캐릭터가 어쩌고 그림체가 저쩌고 하는 만화책 관련 대화가 이어지면,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 식으로 대응했다. 게임은 그것보다 조금 더 노력을 필요로 했다. 스타크래프트가 국민 게임의 지위를 차지했던 시기.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게임 공략책이 있었는데, 그 책으로 단축키와 전략을 외웠다. 게임을 공부하듯 배웠을 뿐이고 잘하지도 못하니, 당연히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매일 PC방에 함께 갔다. 재미없는 게임을 하는 것보다 다음날 대화에서 소외되는 것이 더 싫었으니까. 점심시간에는 길지도 않은 그 시간을 쪼개어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공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던 시간, 나는 적당한 수비 위치에 서서 공과 반대편으로 달렸다. 좋게 포장하면 반대편 공간을 차단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솔직히는 그냥 결정적인 순간에 얽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학생 때 하는 축구는 대개 잘하는 친구들이 공격, 못하는 친구들은 수비를 맡기 마련이고 당연히 그 실력 차로 인해 골을 허용한 것임에도 왠지 수비수가 된통 욕을 먹게 되기 때문이다. 참여자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면서도 눈에 띄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내 목표였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수준의 일을 떠넘기더라도 그냥 웃으며 그 일을 맡았고, 피곤해서 집에 가고 싶은데도 식사 약속이나 술자리에 초대받으면 가야 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선배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담배를 피자며 나를 끌고 나가 상사 욕을 했다. 골프를 치지 않는다고 하니 너 나이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일장 연설을 시작했고, 조만간 배우겠다며 나중에 같이 스크린 골프라도 가자는 헛된 약속을 하고서야 그 자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에 관심 있는 척했고, 재미없는 것을 즐기는 척했고, 하기 싫은 것을 좋아하는 척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내 주위의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모진 사람이라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받기 싫다는 핑계로, 결국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건 바로 나였다.
그래서 그만하기로 했다. 조밀했던 마음속 인간관계 거름망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우선이었다. 예전에는 주위 모두를 챙기려 했었다면, 이제는 성긴 틈 사이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내 마음속에서 커다란 알갱이를 이룬 소중한 이들은 그 엉성한 거름망으로도 충분히 걸러낼 수 있을 것이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내가 맞장구를 쳐주면 헤헤 웃다가도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뒤돌아 욕하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처음에는 바뀐 거름망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이내 몸과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불필요한 인간관계에 휘둘리지 않으니 스트레스는 사그라들었고,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요즘은 그럭저럭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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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한 사람은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지만, 그를 둘러싼 네모에 갇혀서인지 다른 사람에게 그의 말이 온전히 전달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를 둘러싼 경계의 안과 밖. 경계 밖의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좁은 네모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지 않도록 나만의 공간을 넓혀주는 것. 그렇게 만든 커다란 네모 안에서 우연히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와 경계 안에서 즐겁게 소통하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문장들이 우리를 이어 주기를"
지난달 초 서촌에서 열린 책 보부상에 가서 직접 이 책의 저자인 오수영 님을 만났을 때, 책의 첫 페이지에 써주신 글귀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책 속 문장들이 나의 네모를 넓히는 데 약간이나마 쓰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첫 만남이었다. 적당히 가까운 어느 정도 거리에 그의 네모와 나의 네모가 위치하기를, 문장들로 미세하게나마 둘 사이가 이어져 있기를.
사람들은 우리가 어른의 세상에 입국할 때 내밀었던 통행권이 사실은 가짜였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였든 가짜였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른인 척 살아가고 있고, 그들 또한 제대로 된 통행권을 받아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어엿한 어른이라며 자신까지 속이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만들어진 어른들로 들끓는 세상이다. 우리들처럼 말이다.
(p. 27)
나는 고민상담이나 위로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섭다. 유행 따라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무섭고, 정작 위로랍시고 건네는 말들의 생김새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이 시대에 그게 통한다는 사실이고, 자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과 손을 잡았다. 위로가 돈이 되는 시대라니. 사실 위로라는 단어는 꺼내기조차 망설여질 만큼 조심스러운 단어였다. 그만큼 귀하고, 감히 누구나 해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그 단어를 아끼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힐링' 열풍이 불었고, 사람들은 답답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고 싶은 마취의 개념으로 힐링을 소비했다.
... 중략 ...
소란스러운 날들이다. 암기한 것들로 근사하게 말하려 애쓰는 것보다 차라리 입을 다물어주는 게 가장 커다란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건 충분한 침묵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의 위로 없이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 다만 그 기간 동안의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용기는 있어야겠지.
(p. 142)
자신에게 모든 것이 완벽한 환경이 존재할리 없다. 개인의 역량으로, 개인이 꾸려가는, 모든 것이 개인에게 달려있는 일과는 달리, 집단이라는 것은 개인을 위해 만들어진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합리화를 하면서 생업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생업이라는 것은 불만 - 현실인식 - 체념 - 만족 - 권태 - 불만의 영원한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어떤 시기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 할리는 없다. 결국은 다시 나의 생업에 만족하며 살아가든 아니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 하지만 다른 곳에도 결국은 무늬만 다를 뿐 저것과 같은 순환이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은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다. 어딜 가든 밥벌이는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