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로 날아온 돈다발
파키스탄에서 인도 비자 때문에 ‘식겁’을 한 나는, 비자를 받자마자 그날로 파키스탄을 빠져나왔다. 인도로 돌아온 뒤 서둘러 원고를 마무리했다. 남의 나라에 무한정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동 중에도 분초를 아껴가며 게스트 하우스 나무 침대 위에 엎드려 글을 썼다.
지금은 글 한 편을 쓰려고 해도 이런저런 조건을 많이 따진다. 기본적으로 책상과 의자가 편해야 하고, 자판기도 조용하고 손가락에 힘이 덜 들어가는 것을 찾는다. 주변이 시끄러워도 안 되고, 글 쓰는 공간도 쾌적해야 한다. 그런데도 좋은 글이 안 나온다고 주변을 탓할 때가 많다. 그러고는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글을 쓰고 왔으면 좋겠다, 뭐 그런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당시 나는 정말 열악한 상황에서 글을 썼다. 궁지에 몰리니 머리가 돌아가고, 글이 술술 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좋은 글을 못 쓰고, 글 한 편 쓰는데 몇 날 며칠이 걸리고, 그런데도 별로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아직 ‘덜 절박해’ 그런지 모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원고 뭉치(네 번째 원고 뭉치였다)를 한국으로 돌아가는 어느 여행자 편으로 보냈다.
한국에서 날아온 돈다발
한 달 정도 시간이 흘렀다. 보드가야 고려사에서 스님들과 한국인 여행자들과 잘 놀고 있는데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얼굴은 본 적이 없고, 전화 통화만 두서너 번 한 출판사 사장님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장과 작가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출판사에서 전화한 이유는 최종 교정을 위해 한국에 잠시 다녀가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가이드북 성격상 지명이나 이름 같은 고유명사가 많다 보니 편집자 교정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러니 번거롭겠지만 잠깐 나와서 교정을 봐달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옳다구나, 기다리던 말을 해주셨네,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나는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국에 갈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돈이 없어 비행기 표를 살 수 없고, 그래서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사장님은 ’그런 문제라면....‘ 하면서 살짝 웃었다.
다음 날, 다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시티뱅크 켈커타(지금의 콜카타) 지점으로 1천 달러를 보냈다고 했다. 계약금이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1천 달러면 내 입장에서는 거금이었다. 당시 인도에서 태국 방콕을 거쳐 서울 김포공항까지 오는데 500달러면 충분했다.
며칠 뒤 켈커타로 돈을 찾으러 갔다. 송금 수수료를 제하고 970달러 정도를 받았다. 반은 달러로 주고 반은 현지 인도 화폐인 루피로 줬다. 나는 곧 인도를 떠날 것이라 루피가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규정이 그렇다며 막무가내였다.
결국, 100달러짜리 다섯 장과 나머지를 루피로 받았는데, 그것도 100루피짜리와 50루피짜리를 섞어 주었다. 당시 인도 공식 환율이 1달러에 30루피쯤 되었으니 470달러면 14,000루피였다. 지금은 2천 루피짜리 지폐도 있고, 그때도 500루피짜리 지폐가 있었지만, 흔하게 통용되던 지폐 중 가장 고액권은 100루피짜리였고, 일상에서는 20루피와 30루피짜리가 가장 많이 통용되던 때였다.
아무튼 50루피짜리 뭉치와 100루피짜리 뭉치로 14,000루피를 받고 나니 돈이 한가득이었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으로 글을 써서 받은 ’돈다발‘을 들고 은행을 나왔다.
마침내 책이 나오다
며칠 뒤, 무사히 한국 땅을 밟았다. 배낭을 메고 김포 공항을 떠난 지 18개월 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출판사로 갔다. 책은 출간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출판사에 나가 한쪽 구석에 앉아 교정을 봤다.
또 며칠이 흘렀다. 마침내 책이 나왔다. ⟪젊은 여행자들 인도⟫라는 타이틀의 가이드북이었다. 지금은 절판이 되어 나도 구할 수 없는 책이 되고 말았는데, 깨알 같은 글씨에 380쪽이 넘는 엄청난 책이었다. 그렇게 나는 운명처럼 ’글 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