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려움이 새롭다, 이질적이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Custody, 2017 제작
프랑스 | 스릴러 | 2018.06.21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93분
감독: 자비에르 르그랑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두려움이나 폭력을 고발하고자 하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영화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독은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매몰차게 인물들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무심하게 가정폭력을 겪고 있는 한 가족을 들여다본다. 우린 어쩔 수 없이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그건 우리에게 전혀 다른 공포감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줄리앙의 두려움과 우리의 두려움은 결이 다르다. 우린 그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명확히 판단할 수 없다. 판단한다는 말조차 조심스럽다. 우리의 현실은 줄리앙이 겪어보지도 못한 세상이다. 보통의 존재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성찰할 기회조차 그는 가질 수 없다. 결국 아이는 언제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다.
또 거미줄에 걸린 채 몸부림칠 뿐이다.
줄리앙의 하루는 평범한 시간이 아닌, 폭력의 일상으로 시작되어 완성된다. 따라서 그에게 내재된 두려움은 쉽게 타인에게 드러난다. 영화 속 내내 한 곳만을 응시하는 어린아이의 얼굴에서 우린 가혹하기만 한 현실을 경험한다. 그 누구도 나를 지켜줄 수 없는 막연한 공포감, 언제 아빠에게 엄마를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불안함, 어느새 타인의 냉혹한 시선이 익숙해져 버린 처연함.
그런데도 줄리앙은 우리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공허한 눈으로, 곧장 울음이 터질 듯한 입으로 자신의 현실에서 끊임없이 걷는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우린 자기 자신까지도 극한의 상황에 끌려 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줄리앙의 얼굴을 한 채, 충분히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감독은 바라보고만 있음에 안도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정말 당신은 괜찮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폭력적인 남편이자 아빠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하루하루를 두려움 속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엄마 미리암과 아들 줄리앙, 딸 조세핀은 앙투완(남편)을 피해 숨어 산다. 그러나 앙투완은 집요하게 매번 그들을 찾아낸다. 매일 아침 미리암은 창문으로 앙투완의 차를 보며 두려움에 떨고, 아들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또다시 절망한다.
딸은 자신의 남자 친구에 모든 감정을 쏟아붓는다. 엄마와 동생에게는 다른 현실을 선택할 기회가 없지만 딸에게는 존재한다. 남자 친구와 보내는 몇 시간, 하루, 이틀, 삼일에 그녀는 목숨을 건다. 조세핀은 앙투안이 존재하는 한 남자 친구와의 사랑을 절대 놓을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사랑은 두려움으로 시작해 안도감으로 끝난다. 더구나 누구도 조세핀의 미래에 손가락질할 수 없다. 화장실에서 임신테스트기를 떨어트린 그녀에게 펼쳐질 삶에,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미래에 부디 아버지 같은 존재가 없길 바랄 뿐이다.
남편이 계속해서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거라는 아내와 억울하다는 남편의 대립은 분명 끝이 나야 한다. 그게 법정까지 갔으면, 해결하고 나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설령 끝이 날 수 없는 싸움이더라도 반드시 도장은 찍고 나오는 것이 우리가 아는 보이는 것만 신봉하는 현실사회 아닌가. 그건 일반인들이 무심코 내린 상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그럴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게 무슨 현실이야?'라고 반문한다.
결국 이 작품은 우리에게 진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이상적이고 객관적인 판사의 앞에 두 남녀를 앉힌다.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아빠의 폭력이 담긴 줄리앙의 편지를 읽은 판사의 입에서 내려진 결론은 미리암과 아들과 딸에게는 무의미하다.
판사는 질문할 뿐이다. 폭력에 희생당하는 이들에게 법정은 당연하게 정의로움을 강요한다.
"여기 둘 중 한 분이 거짓말을 하고 있네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죠?"
우린 미리암도 앙투완도 심지어 판사의 입장에서도 그 상황을 관찰할 수 없어 당황하고 만다. 감독은 판사의 냉철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말투로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만 할 뿐 어떠한 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판사가 궁금한 건 하나다. 누구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파렴치한 사람이.
판사는 어린 줄리앙의 입장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판사의 시각이 곧 감독의 시각은 아니다. 감독은 두 사람이 만들어낸 상황에 집중할 뿐이다. 그 상황에서 피해를 보고 있는 그들의 가족, 특히 아들 줄리앙의 심리를 보여주고자 한다.
결국 사적인 감정과 상상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첫 장면을 통해 미리암과 앙투완이 우리에게 심판받을 준비를 마친 것 같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린 그리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처참하고도 절망스러운 장면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펼쳐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뿐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한다. 감독은 우리에게 어떤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아니 그 의도는 무엇일까. 판사의 판결은 수많은 의문을 답해야만, 나올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길 바란 걸까? 아니다. 애석하게도 우린 끝까지 판사의 입에서 앙투완을 질책하고 비난하는 판결문을 들을 수 없다. 그저 앞집 할머니처럼 구멍 뚫린 문짝을 보고, 그 뒤로 미리암과 줄리앙의 상기된 눈동자를 보며 슬며시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갈 뿐이다.
앙투완의 미리암을 향한 집착은 줄리앙을 자식이 아닌 아내를 만날 수 있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엄마에게 새 애인이 생긴 거라 굳게 믿는 아빠는 아들에게 폭력을 일삼는다. 줄리앙은 언제든지 아빠에게 자신의 목덜미를 내줘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이에 줄리앙은 아빠에게 흔들리는 눈으로 "엄마 때리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엄마를 지키기 위한 아들의 사랑은 영화 속 내내 위태롭게 등장해 더 강렬하게 그려진다. 언제 아빠가 엄마와 자신의 삶을 앗아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줄리앙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앙투완과 마주하기 위해 더 주먹을 꽉 쥔다.
그러나 줄리앙은 어린 아이고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엇나가지 않는 것뿐이다. 그리고 브레이크가 없는 남편의 집착은 결국 가족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만다. 끝없는 의심에 결국 산탄총을 들고 아내와 아들이 있는 집 앞에 들이닥친 아빠. 앙투완의 폭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마지막 충격요법이다. 엄청난 총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뚫릴 때, 모자는 화장실 욕조에서 서로를 껴안고 흐느낀다. 제발 이 순간이 빨리 끝나기를 기도한다.
줄리앙의 현실은 너무나 절망스럽다. 줄리앙의 삶에서 그는 철저히 지워져 있었다. 삶을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욕심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도 분명 자신만의 내일이 존재할 텐데, 그는 너무나 일찍 포기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들에게서 철저하게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분명 끝이 났음에도 어떤 감정으로 이 영화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완성된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미완성의 결말로 남았음에도 뒷맛이 전혀 개운하지 않다.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도 없고, 절망이 더 이상 줄리앙을 옭아매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도 없다. 분명히 열린 결말이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단 얘기다.
어쩌면 우린 타인의 무관심에 익숙해져 버린 그들에게 외면의 돌을 던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현실에 타협하는 사람들에게 외면은 사실 너무나 가벼운 감정이 아닌가. 줄리앙의 공포심이 익숙한 감정이 되어버린 것처럼. 욕조에 몸을 웅크리며 괜찮아질 거란 희망을 꿈꿀 수 없는 가족의 삶을 보며 단순히 두렵다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괜찮지 않다. 절대 끝나질 않을 것 같아서.
그런 현실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몰라서가 아닌데, 두려움이란 감정이 새롭다.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이질적이다.
당신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