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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Mar 18. 2020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가?<레이디 맥베스>

영화, 레이디 맥베스 /  그녀가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 본 리뷰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맥베스 Lady Macbeth, 2016 제작  

영국 |  드라마 |  2017.08.03 개봉 |  청소년 관람불가 |  89분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가?


경건하게 울리는 찬송가와 고풍이 흘러넘치는 교회 안. 그런데 어린 신부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하다. 자신의 결혼식임에도 불구하고 눈치 보기 바쁜 신부 캐서린. 세상 모든 이에게 축하받아야 할 결혼식장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4면이 돌로 세워진 교회 안에서 캐서린이 느낄 수 있는 건 차디찬 냉기와 어딘가 모르게 공포스런 바람소리뿐이다. 그래서 캐서린은 자꾸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려 애쓴다. 두 눈을 열심히 굴려가며 상황을 관찰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아줄 이는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남편의 옆모습에 철저한 무관심을 느끼고, 아무 감정 없이 입을 벌려가며 찬송가를 부르는 시아버지와 목사에게서 어떠한 인간적인 면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의 숨통을 쥐고 흔들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만다.


이 단 한 장면에서 <레이디 맥베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결정되어버린다. 인물들의 비열하고 저속한 속내는 어김없이 카메라 사각틀에 드러나고, 진행될 사건들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란 강한 확신과 함께. 따라서 한동안 허공을 맴돌던 신부의 시선이 이윽고 자신의 님편에게 향할 때, 우린 단번에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예측한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남편의 무관심은 결혼식 첫날밤을 기점으로 경멸과 조롱으로 얼룩진다. 한 침대에 몸을 뉘어 함께 자지만, 그들은 부부가 아닌 남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남편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방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캐서린에게 그대로 자신의 분노를 지배로 치환해 행사한다. 캐서린이 자신과 함께 사는 이유는 딱 하니다. 아내를 아버지가 돈주고 사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캐서린에게 바라는 것도 딱 하나다.


조용히 집 안에서 기생하면서 아내의 본분을 지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아내의 본분은 '아버지가 말하는 아내의 본분'을 말한다.

결국 남편에게 캐서린은 처음부터 존재 가치가 없는 존재였으며, 버릴 수 없어 마지못해 세워두는 마네킹이었다.

  

집 안에서 하녀(애나)의 시중을 받으며, 완벽하게 외면을 치장하고, 보기 좋은 인형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캐서린. 그런 그녀 앞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세바스찬이 등장한다. 창고 안에서 애나를 위에 매달아 놓고 성추행을 일삼는 세바스찬을 보고 캐서린은 너무나 쉽게 욕망을 분출하는 그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몸에 잔뜩 묻은 흙도 꾀죄죄한 얼굴도 땀 냄새도 전부 비극적인 운명을 살아야 하는 그녀에겐 금기를 깨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것을 캐서린은 '진정한 사랑'이라 스스로 칭하며 세바스찬에게 "내 마음을 의심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자유를 열망한 욕망에서 태어난, 몸의 난잡한 행위일 뿐이다. 자신의 공허하고 답답한 내면을 채우고 풀어내고자 한 탈출방식으로 인식했을지 모르나, 사실 캐서린의 행위는 오직 피지배자를 향한 잔인한 지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레이디 맥베스>의 긴장감과 재미는 사실 캐서린의 살인보다도 그들을 조용히 따르는 두 하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애나는 자신을 짐승 취급한 주인(캐서린의 시아버지)이 캐서린이 쓴 독으로 죽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방관한다. 그녀는 그것이 살인이란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떨 뿐이지, 주인을 구하는 행동까지는 하지 못한다. 애나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라는 주인의 명령에 세뇌된 하인이었고, 살면서 인간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으며, 그 울분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사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후 일어나는 2건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다. 주인이 죽고 난 후,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충분히 증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애나는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음에도,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다.


살려고 발버둥 치려는 캐서린과 대조되는 까닭은 바로 신분 차이다. 캐서린은 사람을 부리는 법에 능통한 여인이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살인도 불사하는 인간이다. 반면 애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반항과 의심, 자기주장 표현은 그녀, 스스로 포기한 것들이다. 결국 그녀가 밧줄에 묶여 짐승처럼 대저택을 나가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의 본질까지 가장 낮은 신분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캐서린을 사로잡은 세바스찬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캐서린의 지위와 권력에 눈이 먼 하인을 뿐이다. 입어보지 못한 옷과 앉아보지 못한 의자와,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 흥분한 하인. 자신이 캐서린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자부했으나, 어림도 없지. 캐서린이 남편의 머리를 가차 없이 막대기로 내려친 후, 그의 시신을 혼자 땅에 묻은 그 순간부터 세바스찬은 죽음의 배에 올라타고 만다. 그것도 아주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자신을 죽이려는 주인(캐서린의 남편)을 캐서린이 죽였을 때 얼마나 묘한 희열감과 해방감을 느꼈을까.  그평생 실종된 주인의 자리에서 부를 누리며 살 거라 자부했을 것이다. 살인을 한 대가는 죄책감을 떨쳐버릴 정도로 달콤해야 했으니까.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한다. 바로 캐서린 남편의 혼외자. 어린 아들이 순식간에 대저택의 주인이 되자, 세바스찬은 자신이 누린 부가 원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캐서린을 닦달하며 밀어낸다. 이에 캐서린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이를 죽여버린다. 역시 세바스찬과 함께, 두 사람은 그렇게 또 사람을 죽이며 서로에게 사랑을 확인한다.


자, 캐서린은 총 3번의 살인을 저질렀다. 자신을 억압하고 지배한 집 안에서, 자신을 억누를 위치에 있는 남성들의 목숨을 전부 단번에 끊었다. 첫 살인부터 계획적이었고, 일방적이었다. 애나는 첫 번째 살인을 함께했고 세바스찬은 나머지 2건의 살인을 동조했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을까?


살인을 한 3명은 모두 살인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는 인물은 오직 캐서린뿐이다.


자신의 죄를 이겨낼 수 없었던 세바스찬은 캐서린과 함께 살인을 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부에 선택받지 못한 인물이었기에 평생 누더기 옷을 입었고, 괄시와 무시가 삶을 이루는 패턴이었고 공식이었다. 이에 세바스찬의 고백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고 지배자들의 발아래로 추락해 철저히 무시당한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캐서린의 지위가 튀어나온 건 너무나 당연한 스텝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가 가진 힘을 또한번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세바스찬의 배신에 악에 받친 눈으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애나와 세바스찬의 살인 공조로 사건을 종결 내버린다. 실어증에 걸린 애나에게서 어떠한 반전도 일어나지 않음을 확신한 채 말이다. 그것이 시아버지와 남편이 말한 '가진 자의 본분'을 너무나 잘 습득한 결과다.  

출처: 영화 <레이디 맥베스> 스틸컷

<레이비 맥베스>의 희한한 매력은 영화 내내 캐서린만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는 점이다. 애나와 세바스찬의 선택과 행동에 이상하리만큼 엄청난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점은 꼭 생각해 봐야 한다. 세 사람은 모두 대저택 주인들에게서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오직 캐서린만 홀로 반항하고 반기를 들었다. 그녀만 불합리에 순응하지 않았다. 세 명을 모두 피지배자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캐서린은 물 아래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앙칼지게 주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세바스찬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아이의 아빠를 버리는 행위까지 전부 다.

물론 하인이 어떠한 반전도 선사하지 못한 까닭관객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점을 <레이디 맥베스>가 교묘하게 조립했기에, 우린 캐서린의 엽기적 행위에 더 놀랄 수밖에 없다.  

 

비극의 원인은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시작되지만, 그 사회를 무너트린 것은 캐서린이다. 그녀를 알몸으로 세워두고 홀로 잠을 자던 남편의 조롱과 사고파는 물건으로 취급했던 시아버지의 경멸적 태도는 캐서린을 끔찍한 괴물로 만들었다.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상류층에게서 배운 괴기스럽고 소름 끼치는 지배력이 그대로 살인을 일삼는 캐서린을 탄생시켰기에,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수없이 벌하고 싶은 마음과 살인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한 행위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으니까.


하인들마저 다 떠난 대저택에 홀로 남은 캐서린, 그녀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살인죄를 평생 짊어지고 가도 부족할 형벌만 남았으니까. 따라서 소파에 앉아 가만히 관객을 응시하는 캐서린의 마지막 행보는 잊을 수 없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자신의 현재에 어떠한 후회도 하고 있지 않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매서운 그 표정.


그렇다. 그녀 더 이상 남편을 힐끗대던 열일곱 소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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