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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Feb 27. 2020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렵기에 <체실 비치에서>

다른 선택이었을지라도 비극적 결말은 같았을 것이다

체실 비치에서 On Chesil Beach, 2017 제작  

영국 |  로맨스/멜로 외 |  15세이상관람가 |  110분

감독: 도미닉 쿡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렵기에 <체실 비치에서>




앞이 창창한 부부가 결혼한 지 6시간 만에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비난을 쏟아내고 이별한다. 자신에게 딱 맞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행복하고 축복받는 날에 난데없이 헤어짐을 선택하는 두 사람. <체실 비치에서>는 끝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해 절절한 그리움만 남겨버린 시간 속에 숨어버린 연인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출처: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영화 <체실 비치에서>는 이언 매큐언 소설가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 <어톤먼트>(2007)를 몇 번이고 눈과 가슴으로 담은 터라 그의 소설이 스크린으로 옮겨진 영화라면 무조건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더구나 <칠드런 액트>(2019)도 인상 깊게 봤기에, 시기를 놓쳐 보지 못했던 <체실 비치에서>(2018)를 그냥 흘러 보낼 수 없어 뒤늦게 접했다. 개인적으로 그의 소설도 무척이나 좋지만,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명료하게 담아낸 영화가 더 좋았다. 원작을 발판 삼아 새롭게 태어난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큼 좋은 떨림은 없지 않은가.

또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시얼샤 로넌과 빌리 하울의 연기만 봐도 즐거운 작품이 바로 <체실 비치에서>다. 시얼사 로넌은 정말 사랑스러운 배우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어톤먼트> 속 13살의 브라이오니였다. 사춘기 소녀의 눈망울에서 보인 질투와 시기 만으로 관객에게 극한의 긴장감느끼게 하는 그 장면이 특히 기억난다. 분명 아주 오래도록 회자될 명장면일 것이다. 또한 그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브루클린>(2015), <레이디 버드>(2017), <작은 아씨들>(2019)까지 굵직하다 못해 영화를 뚫고 나오는 아우라를 가진 배우임에 틀림없다. 물론 <호스트>(2013)가 어설프긴 하지만, 경험의 산을 오르기 위한 발판이라 생각하기엔 충분한 작품이다.
빌리 하울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7)에서 반한 배우다. 묘한 긴장감을 가진 얼굴과 마르지도 둔하지도 않은 몸매와 결정적으로 순수함과 타락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소가 참 매력적이다. 두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즐거움었고, 역시 배우들 섬세한 연기로 화답했다.      

출처: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이토록 배우들을 찬양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체실 비치에서>란 '소설'과 별개로 '영화'에 초점을 맞춰서 봐도 배우들이 전달하는 이야기의 힘은 탁월하다. 우 덕에 사건이 재미있고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때론 이야기의 진행보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물들이 주는 마성의 매력이 영화를 더 빛내기도 하니까.  이 작품은 스토리가 주는 감명보다 인물들의 요동치는 감정선이 더 진한 여운을 남게 한다. 그건 번을 곱씹어봐도 똑같을 것이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자기 자신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이혼을 위한 결혼'을 한다. 각자 품고 있던 마음의 구멍을 메울 유일한 존재를 찾았다며, 함께 살기로 약속한다. 그런데 어째 오묘하게 불편해 보인다. 영화의 시작부터 느껴지는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 서로를 향한 동상이몽이 분명 큰일을 낼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원하는 점이 너무나 달랐다. 여자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 당한 성적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남자는 사고로 머리를 다친 어머니를 아들임에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더구나 성생활에 대해 그들은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모두 문외한이었다. 이는 결국 플로렌스에게 섹스에 대한 무한한 공포를 갖게 하고, 에드워드에겐 자신감 결여란 불안을 주입하고 만다. 그리하여 그들의 첫날밤은 시작도 전에 긴 추억여행에 강제로 빠지게 된다. 의로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첫날밤은 폭탄을 품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강제로 떠난 그들의 과거 이야기가 <체실 비치에서>의 사건 전달 구성 방식이다. '체실 비치 근처 호텔방(현재)과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삶의 궤적(과거)'이 쉼 없이 교대로 등장하면서, 그들이 헤어짐을 택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보여준다.

출처: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에드워드의 아킬레스는 어머니였다. 그는 사고로 머리를 다친 어머니의 기이한 행동을 시간이 흐른 지금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역사학과에 수석을 차지했음에도 가족 누구에게도 축하를 받지 못하는 상황도 알아서 이해해야 하는 존재감 제로인 가족 구성원. 지금 가족의 관심이 어머니를 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에드워드는 미치도록 외롭다. 그런 그에게 마법처럼 플로렌스가 나타난다. 처음 만난 그녀에게 자신의 수석 소식을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첫눈에 반하고 만다. 어머니의 눈높이에서 진정으로 그녀를 이해하는 플로렌스를 보며 조용히 혼자 숨죽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자책과 부끄러움과 고마움, 그리고 플로렌스를 향한 확신이 뒤엉킨 눈물이었다.
플로렌스는 부잣집 딸이지만, 그만큼 억압된 삶을 살고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두려움과 새로움을 향한 경멸에 익숙한 집안에 대한 반항심이 극에 달했을 때, 에드워드를 만난다. 자신의 목마른 자유를 어렵지 않게 행하고 있는 그에게서 그녀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욕심이 많은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을 존중하고, 믿고 사랑하는 에드워드와 자기가 만든 4중주 그룹만 있으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플로렌스였다.

완벽한 운명의 짝이 틀림없던 그들임에도 끝은 비극이 되고 만다. 그들은 서로를 부러워하기 이전에 먼저 '나'를 사랑했어야 했다. 현재의 나를 믿고 존중했어야 했다. 서로에게 원했던 마음과 감정을 발견해 사랑을 키웠지만 그것은 너무나 쉽게 무너질 모래성이었다. 그만큼 둘은 실수 투성이었고, 어렸고, 진실하지 못했다. 첫 부부싸움이 각자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화해도 역시 무참히 결렬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안타깝게도 두 남녀는 자신의 자존심을 무너트리지 않으려 사랑하는 상대에게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총동원해 비난하고 상처를 주고 만다.

출처: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컷

그렇게 헤어진 뒤로 두 사람은 긴 시간 속에 묶인 채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간다.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 서로에게 했던 행동들을 자책하기도 하고, 눈물을 훔쳐가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에드워드가 우연히 플로렌스의 딸과 만나고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 역시 그저 과거를 후회하는, 추억거리에 불과할 뿐이다.


역시 어떤 이의 말처럼 결혼은 외롭고 결핍에 고통스러워서 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혼자로도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때 하는 것일까. 두 사람의 이별이 비극일 수밖에 없는 건, 서로를 향한 마음의 넓이가 아닌 생각의 넓이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먼저 포용할 생각이 없었던 까닭은 그동안 자신들의 위태로웠던 삶을 지켜줬던 '자존심'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체실 비치에서 다른 선택을 했었어도 결말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악의가 담긴 말은 토해내기 참 쉬운 법이다. 그 말을 주워 담거나 틀어막는 대신, 진심이 눈에 보일 행동을 직접 하는 것이 상상도 못 할 만큼 어려운 거지.


배우들의 빛나는 표현력이 인물들을 마음속 더 깊은 곳에서부터 떠올리게 하는 영화, <체실 비치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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