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으로 와이어 액션을 프로페셔널하게 하는 배우 오티스. 거칠고 위험한 촬영에도 힘든 기색 없이 연기를 마무리한다. 고작 몇 클립 정도이지만, 그가 현재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배우 중 한 명임은 틀림없다. 문젠 그가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시도 때도 없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불안정해 보이고 어딘가 붕떠 보이는데, 이를 통해 우린 그가 정서적으로 아주 불안한 삶을 살고 있음을 눈치챈다. 언젠가 그가 자기 발에 크게 걸려 넘어지겠단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허니 보이>는 이 확신을 현실로 만들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티스는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낸 뒤, 재활원에 들어간다. 자업자득이지만, 어딘가 불쌍해 보이고 안쓰럽다. 그가 원했던 미래는 결코 아니었겠지. 다만 확실한 건, 폭주기관차처럼 살면서 빨간불을 만나면 망설임 없이 숱하게 해온 신호 위반을 이젠 못한다는 것이다. 오티스는 이번 빨간불만큼은 절대 웃으며 지나칠 수 없다. 위반한 순간 그는 감옥에 수감되고 배우 인생은 쫑이니까. 배우를 할 수 없으면 다른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허니 보이>가 비극적인 이유는 오티스에게 아슬아슬한 배우 인생 말고는 자신을 지탱할 삶이 없다는 점이다. 결국 감옥 수감은 인간 오티스의 회생 가능성 없는 추락으로 이어지게 하는 지름길인 셈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을 적으며 느끼는 고통을 숫자로 표현하고, 다양한 재활 프로그램을 통해 그 고통과 괴로움을 차츰 줄여나가야만 하는 오티스. 그는 결고 쉽게 재활원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 지금까지 꽁꽁 싸맸던 자신의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노트에 적어 내려갈 정도로 그는 건강한, 아니 건강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망나니 오티스'를 만든 현실에 적응한 채 지배당하고 있을 뿐이다.
'망나니 오티스'를 만든 사람은, 그에게 분노와 고통만을 가르쳐준 자는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출처: 영화 <허니 보이> 중 스틸컷
제임스 로츠는 이혼했으나 오티스 어머니를 강간하려 한 성범죄자(전과자)이자, 어린 배우 오티스의 매니저이자, 하나뿐인 오티스의 아버지다. 아, 오티스의 새아버지(톰)를 질투하고 경멸하는 친아버지다. 입에 욕을 달고 살고 담배도 대마초를 말아 피우며, 옷은 오토바이 폭주족에 가깝다. 어디 하나 평범하다 못해 이상적인 아버지 상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제임스 로츠. 이 정도면 다들 눈치챘을 것이다.
현재의 오티스가 가진 별명 '망나니 오티스'의 유래를.
어린 오티스는 보기에도 불안정한 아버지의 영향 아래, 단 한 번도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껴보지 못한다. 아버지의 혹독한 연기 공부가 유일하게 그에게 직업적 측면을 넘어서 아버지와의 유대를 이어가게 할 뿐이다. 로츠의 아들 양육방식은 흔히 평범한 가정에선 볼 수 없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얼룩져있다. 12살 아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건네고, 명색이 배우 생활을 하는 아들의 자존심을 욕설과 비아냥으로 깔아뭉개는데 선수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폭력을 사용하면서 망나니짓을 부끄럼 없이 아들의 눈앞에서 자행한다.
마치 '내 삶은 원래 그래.' 아니 '너와 나의 삶은 이게 정상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티스의 가정환경이 이토록 암흑적인 이유는 짐작했듯, 로츠의 가정환경이 훨씬 더 어둡고 음울했기 때문이다.
로츠는 갑자기 동성애자라고 고백한 어머니 밑에서, 함께 사는 어머니의 애인이 저지르는 끔찍한 폭행을 보아왔다. 사랑을 찾아간 어머니의 미래는 온통 핏빛이었고, 로츠는 그녀를 보며 사랑의 정의를 '난도질'로 배웠다. 설상가상으로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로에 떨어져 죽은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은 그에게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고, 결국 로츠에게 일찍이 담배, 마약, 술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인생이 아주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깨어나 보니, 제가 성범죄 자라요."
아내를 강간하려 한 그의 삶은 어머니가 한 극단적 선택처럼, 살기 위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린 아내의 선택으로 완전히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어머니의 삶이 그대로 자신을 통해 아내에게 이어졌고, 로츠는 그것이 그저 흔한 우연 따위가 아님을 믿었다. 자연스럽게 원망은 자신을 성범죄자로 만든 아내에게로 옮겨갔고, 평생을 어린 아들을 방패 삼아 전처를 욕보이는 데 삶을 허비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오티스에게 전처를 향한 온갖 욕설을 직접 전하게 했으니, 더 말할 필욘 없을 듯하다.
출처: 영화 <허니 보이> 중 스틸컷
<허니 보이>의 매력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두 인물, 부자의 연기력에 있다. 그들의 강렬한 표정들과 날카로운 대사들이 밋밋했다면, 이 작품의 존재가치는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동시에 경멸하고, 비난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아슬하면서도 안타깝고, 나아가 비극적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아버지'로, 아들은 아버지에게 '여전히 추악한 현실을 견디기 힘든 애송이'로 기능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무겁고도 고귀한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감정에 아버지가 가진 트라우마와 아킬레스건이 섞인 순간부터, 오티스를 향한 부성애는 폭력과 비난으로 얼룩진다. 아들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는 '아빠답게 행동하는 아빠'는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었다. 로츠에게 부성애는 지옥 같은 현실을 버텨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과제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그는 아들을 사랑했으나, 그 방식은 결코 사랑이란 말로 정당화할 수 없는 범죄였다. 그는 입버릇처럼 "난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라 말하며 자신의 책임의식을 강조하지만, 실상은 아들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아버지일 뿐이다.
재활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던 오티스는 점차,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품고 있는 분노와 고통의 크기를 숫자로 표현하고, 거침없이 감정을 표현한다. 물론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노트에 아버지에 대해 쓰기 전까지 그는 재활원에서도 겉돌았으며, 혼자 어둠 속에서 생활할 것을 강력히 표현했으니까.
그의 아버지처럼, '난 정상이야!'라고 소리치면서 말이다. 그가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영화는 과거로 이동한다. 이후 오티스가 점차 자신의 고통을 직접 대면하기 시작할 때는 어린 오티스의 감정과 어른 오티스의 감정이 수없이 교차되면서 반복된다. 어린 오티스가 느꼈던 고통이 그대로 어른 오티스에게 머물러있었기 때문이다. 재활원에 입소한 그는 여전히 상처와 분노를 가진 어른 오티스였다.
그는 결국 치료사의 조언대로 숲 한가운데에 가서 목청이 터져라 고함친다. 한 번도 가슴 밖으로 표출해본 적 없는 분노를 고요한 나무들 틈에서 쏟아낸다. 그러나, 오티스의 근본적인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요없는 방법일 뿐이란 걸 누구보다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현재의 오티스가 고통에 몸부림칠 때, 과거의 어린 그는 아버지와 격돌했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잘 대해주는 앞집 소녀 샤이 걸과 가까워지면서, 아버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모욕으로 곱씹었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연기하는 와중에 배우(아버지 역)의 입에서 "말로 다 못할 정도로 사랑한다."란 말을 듣자마자,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울컥하고 만다.
그 말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로츠는 오티스가 나온 그 드라마를 보면서도, 오로지, 아들이 연기할 다음 씬만을 생각한다. 아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고 고민해보지 않은 아버지라니... 하지만, 그는 그의 세계에선 완벽한 정상인이었다. 그가 살아온 세상은 매일, 매 순간 치열하지 않으면 안 됐었으니까. 치열함을 넘어 비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였다.
출처: 영화 <허니 보이> 중 스틸컷
오티스는 모든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 로츠의 앞에 나타난 유일한 그의 핏줄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해 그를 키우고자 시발점은 분명 피 끓는 부정이었으리라.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건 허름한 여관과, '아들에게 돈을 타 쓰는 무능력하고 파렴치한 아버지'란 평판뿐이었다. 아들을 위해서 산다고 다짐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더 작아지고, 누추해졌으며, 비관적으로 변해갔다. 막살던 인생으로 회귀하는 중이었고, 이번엔 대놓고 아들을 끌고 가는 중이었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책임 안에 보통의 아버지들이 가질 수 없는 생각들을 집어넣으며 자기 정당화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돈을 벌기 위해 도로 옆에 마리화나를 다시 피우기 시작하고, 오티스의 새아빠 톰을 수영장에 빠트리며 자신의 부덕함을 부정하고, 거기에서 멈추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몸부림치는 아들의 처절한 외침에 싸대기를 날리는 폭력과 학대를 자행한다. 동시에 아들이 하는 모든 폭력적 행위가 자신에게서 그대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 그러나, 그것은 로츠의 잘못된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평생 홀로 삶을 살아가야 했다면, 조금은 다른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니라, 망나니 로츠였다면 말이다. 세상에 그만 오점으로 남았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지 않은가. 분명 그는 아들을 위해 살겠다 다짐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해 아들을 대배우로 키우겠다 선언했었던 아버지였다.
그가 비난받지 말아야 할 이유를 어둠 속에서 보낸 유년기라 쉽게 정의하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적어도 오티스의 가슴속에서 이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빠가 내게 준 건 고통뿐인데 그것마저 뺏어가려고요?"
<허니 보이>를 격렬하게 비난할 수 없는 이유였다.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걸까.
출처: 영화 <허니 보이> 중 스틸컷
아버지의 기행을 보며 자란 오티스가 바란 건 아버지와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일이었다. 그에게서 온전히 사랑받고 따뜻한 집에서 함께 쉬고, 놀고, 일하는 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 제발 자신에게 잘 대해 달라는 그의 처절한 외침을 아버지가 손쉽게 무너트렸음에도, 그에게 '여기 있어주세요 아빠'라고 얘기한 이유였다. 수없이 아버지와 고함을 치며 말다툼을 해도,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고, 함께 오토바이를 탔던 부자의 연속된 삶은 끝내, 오티스에게 아버지란 존재를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연기로 자신의 꿈을 키워가던 것도 사실, 아버지가 자신을 떠날 까 불안한 마음에 지속된 행위였다.
자기의 자존심을 뭉개는 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매니저 취급을 하며 계약관계를 명시한 이유 역시 같은 본심이 숨겨져 있다. 오티스는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언제든 자기를 버리고 떠날 거란 예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연기 활동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님 아버지를 붙잡고 싶어 억지로 하는 것인지 완전히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 채 성인 배우가 되어 버린 거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에게 '어떤 인간으로 어떻게 삶을 살 겁니까?'란 철학적 질문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오티스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것이라곤 고통밖에 없음에도 이를 인정하고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를 기억하고 가슴속에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추억이었으니까. 또한 로츠를 진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들한테 돈 타 쓰는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제가 돈 안 주면 떠날 거잖아요."
맞담배를 피며, 서로 진정으로 모든 걸 털어놓은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한다. 사실, 화해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들만의 작은 집 맞은편에 사는 샤이걸의 시선에서만 봐도 알 수 있는 명확한 진실이다. 여전히 아들은 아버지의 기행으로 인해 풍전등화 상태에 놓여있었고, 결국 현재 로츠의 상황은 미궁 속에 빠져있지 않은가.
출처: 영화 <허니 보이> 중 스틸컷
오티스가 재활원을 나와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장면부턴, <허니 보이>의 본격적인 열린 결말로 향하는 길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재활원에서 변화된 자신을 보여줘야만 했고, 상담자의 조언에 따라 '자기랑 맞지 않는 건 없애야 함'을 인정한다. 하여 오랜 시간 동안 보지 않았던 아버지를 만나러 허름한 여관으로 향한다. 착한 사람들이 너무 아파, 술을 퍼마시게 되었다며 세상에 원한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남긴 아버지에게, 아들은 비로소 그 원한을 내려놓아야만 한다고 대답한다. 그렇지 않으면 로츠 자신이 죽고 말 것이니까. 아마 본 영화를 통틀어 관객이 가장 바란 부자의 대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끝내 결말을 알 수 없다. 로츠의 현재를 말이다. 정말 오티스와 만났는지, 아들의 상상일 뿐인지 알 수 없다. 마리화나를 키운 사실을 들켜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는지, 그도 아님 극단적 선택으로 오티스를 영영 떠나버렸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로츠는 어른이 된 아들을 향해, 이제 자신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없다며 죽어도 여한이 없단 말을 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를 경멸하고 무시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오티스에게 그 말을 전했을까.
이윤 딱 하나다. 오티스가 로츠를, 자신에게 고통만을 안겨준 아버지를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를 용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여, 로츠는 비로소 아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정말 로츠의 언어일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던 마음에서 비롯된 한 마디였을까. 이 역시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내내 망나니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는 <허니 보이>에 애초에 숨겨진 반전 요소가 아니니까. 분명한 건, <허니 보이>가 로츠의 시선이 아닌 오티스의 시선으로 시작해 끝났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로츠의 결말을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아버지의 등에 기대 오토바이를 탔던 오티스가 비로소 아버지를 뒤에 태우고 오토바이를 모는 장면이 유종의 미를 거두니까. 나아가 우린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사라지고 홀로 오토바이를 타는 그에게서 희미한 미소를 본 순간, 이 작품이 로츠가 아닌 살아남은 자 '오티스'를 위한 이야기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허니 보이>의 이러한 결말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이란 가슴 절절한 메시지를 담음으로써 확실한 임팩트를 주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오티스를 이해하게 만드는 마음을 갖게 한다.
즉, 감동적인 드라마로 끝을 맺는 거다.
사실 참 다행스러웠다. 오티스가 스스로 끊어낸 비극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종종 아버지를 떠올릴 거란 확신이 들지만, 이를 비난하고 싶진 않다. 이윤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미 긴 글을 통해 그들에게 연결된 진한 선들을 확인했으리라 믿는다.
그저 오티스에게 더는 화내는 사람이 없을 거란 말로, <허니 보이>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점이 기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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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허니 보이>는 배우 샤이아 리버프가 각본가로 참여했다. 실제 그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며, 직접 아버지의 역할을 연기했다. <허니 보이>를 놓칠 수 없는 또 다른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