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란 Dec 20. 2020

개인의 욕망과 불완전한 너의 착각,  <서버비콘>

영화적으로도, 인물적으로도.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버비콘> Suburbicon, 2017 제작  

감독: 조지 클루니

                                                                     

개인의 욕망과 불완전한 너의 착각, <서버비콘>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 남들보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로 인해 자기 자신을 속여가며, 그런 '척'하며 살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는 사람들. 그리하여 결국엔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는 자들. 처음엔 그들을 긍정으로 볼 지, 부정으로 볼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우린 저마다의 착각 속에 빠진 채 행복을 추구하고 불행을 맞닥트리는 존재가 아닌가. 무엇보다 착각이 아니더라도 어떤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때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우리가 아닌가.

물론 여기서 주체는 타인이 아닌 나다. 타인을 향한 질문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마음속 물음을 의미한다.

우린 모두 불완전한 개인이니까.

출처: 영화 <서버비콘> 스틸컷

<서버비콘>에도 불완전한 개인들 투성이다. 영화는 앞서 제기한 물음에 진작부터 완벽한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우릴 초대한다.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타인이 날 볼 때도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사는 '나'라고 믿는 군중 한가운데로 말이다. 그들은 서버비콘에 사는 것이 무슨 대단한 업적이라도 되는 듯이, 하나의 유기체로 똘똘 뭉쳐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과 권리를 요구하는데 프로다. 무엇이 자신들의 체면을 세우고 떨어뜨리는 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요구한다.

우리 마을의 질과 가치를 떨어트릴 위험성이 있는 흑인 가족을 쫓아내야 한다고. 


영화 <서버비콘>은 백인우월주의에 스스로 지배당함을 택한 자들 속에서도, 특정 목적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한 가족의 가장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흑인 가족을 쫓아내기 위해 온갖 추한 방법을 고안하는 주민들 안에 그들보다 더한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단 얘기다. 물론, 그 벌레 역시 흑인 가족 제거에 열렬히 환호하진 않지만, 암묵적인 동의 표를 들었다.


흑인 가족의 이야기는 <서버비콘>의 메인 플롯은 아니다. 그러나 메인 플롯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고 등장해, 사건의 긴장감을 풀기도 조이기도 한다. 인종 차별 문제와 개인의 잘못된 욕망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목적이 뭘까. 착각, 바로 당신의 착각이다. 그들의 착각이며, 그의 착각이다. 어디서 듣고 무엇을 보고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정보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진실이라 믿는 자들에게 '착각'이란 단어 한 방으로 기를 확 죽여버리는. 그렇다. 이 작품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나와있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출처: 영화 <서버비콘> 스틸컷

가드너는 아내(로즈)를 죽이려 살인청부업자에게 강도 살인을 의뢰한다. 안전하고 행복한 서버비콘에 살면서, 말도 안 되는 위험을 감수하는 까닭은 아내의 동생, 마가렛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로즈와 마가렛은 쌍둥이 자매지만, 가드너에게 마가렛은 로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성이다. 왜일까?

마가렛은 멍청하고 로즈는 영리하다.

가드너는 맹한 처제를 순수하다 보고, 지적인 아내를 경멸했다. 뭐, 그가 정확히 로즈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불륜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남자는 수십 번을 봐도 똑같다. 멍청한 남자에겐 멍청한 여자가 어울리는 법이니까. 이미 로즈는 가드너의 계략으로 죽을 뻔했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진 않았지만, 하반신 마비를 얻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고'로 기록되었으나 영민한 로즈가 모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영화는 로즈에게 가드너를 한 방 날릴 수 있는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에게 내려질 엄벌은 이제 시작이니까.


살인청부업자는 계획적으로 가드너의 가족을 식탁 의자에 묶어 놓고 로즈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취액을 두 번 흡입하게 해 가드너와 마가렛의 사랑에 시작을 알린다. 엄마를 잃은 슬픔에 울적해진 니키를 빌미로 마가렛은 가드너의 집에 짐을 푼다. 진짜 그들만의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서버비콘>의 진짜 이야기는 가드너와 마가렛이 용의자를 눈 앞에 두고 모른 척하는 걸, 아들 니키가 본 순간부터 시작된다. 엄마를 죽인 두 살인자를 잊어본 적 없는 아들은 본능적으로 아빠와 이모를 경계한다.

그러나, 니키는 어린 양일뿐이다. 로즈의 금발로 변신한 마가렛과 경찰의 조사에 응하지 않는 가드너의 비이상적인 행위가 지속될 때마다, 니키는 가만히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간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웃으로 이사 온 또래 흑인 친구와 캐치볼을 하는 일. 그리고 엄마를 그리워하며 아빠와 이모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출처: 영화 <서버비콘> 스틸컷

반면, 마이어스 가족은 여전히 집 주변에 거대한 나무벽을 세우는 백인들을 볼뿐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집을 둘러싸 소음과 욕설을 섞어가며 괴롭히는 그들에게 침묵으로 대응한다.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매서운 기세로 교양과 우아함으로 부를 누리고 있다 자부하는 백인들의 민낯을 보여주는 역할로서 기능한다. 이 영화에서 마이어스 가족 활용법은 딱 거기까지다. 침묵하는 것, 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백인이 가진 추한 편견과 체화된 잘못된 인식을 고발한다. 영화 <서버비콘>이 드러내는 백인의 모습은  화려한 네온 불빛으로 치장한 미국이다.(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으로 블랙 코미디와 묘한 스릴감이 섞여 있다.) 마이어스 가족이 겪는 불쾌하고 불안한 사건을 가드너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교차해 보여주는 건, 오만함에 빠져있는 미국의 민낯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난 미국이 아닌, 백인이 아닌 개인에 집중한다. 개인이 가진 착각에 대해.

<서버비콘>은 자신이 하는 일이 완벽하고 정당한 일이라 착각하는 개인들을 다룬 작품이다.

그래야, 작품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가령, 주인공으로 착각한 가드너에 대해 말이다.  

아들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들켜버린 청부업자들은 가드너를 폭력을 사용해 위협하고, 보험조사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가렛의 검은 속내를 읽어버리며 보험사기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한다. 나아가 아들에게 마가렛과의 정사를 들켜버렸으니, 사실상 가드너는 주인공으로서 느껴야 할 고난은 다 겪는 셈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는다. 니키에게 아빠란 위치를 이용해 삼촌과의 연락과 자신을 향한 불만과 분노를 제거한다. 자신을 진정한 남자로 믿는 마가렛이 있기에 청부업자와 보험조사관만 잘 해결해 돌려보내면 된다고 믿는다. 역시 착각에 불과하지만, 가드너는 이를 맹신한다. 그를 대표하는 중산층에게 없어도 있교양이 아니라 돈이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서버비콘> 스틸컷

이후, 사건은 빠르게 전개된다. 가드너의 집에 보험 조사관과 살인청부업자가 차례로 찾아오면서, 살인은 그야말로 꽃을 피운다. 마가렛은 보험 조사관을 독살하고, 가드너는 그의 차를 이용해 시신을 유기한다. 니키는 방 안에 숨어 문 앞에 방어막을 설치하고, 마가렛은 니키에게 줄 샌드위치에 독을 넣는다. 이때 살인청부업자가 등장해 마가렛을 죽이고, 니키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삼촌에 의해 죽는다. 니키를 옷장에 숨긴 삼촌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가드너가 마침내 집으로 들어온다. 자신을 따라온  다른 살인청부업자는 그가 믿는 '신'의 호의로 죽었기에, 주인공은 마지막 남은 아들을 바라본다.


아들을 계획대로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손에 묻은 피며 살인의 축제로 인해 집안에 도배된 증거들을 보던 가드너는 마치 완벽한 시나리오가 생각난 듯, 식탁에 자리한다. 니키를 향해 당당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연설한다. 아들을 향해 널 죽이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읊는 동시에, 모두가 예견했듯 니키를 위해 마가렛이 만든 독이 든 샌드위치를 먹는다. 그것도 아주 게걸스럽고 맛있게. 분노와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던 니키는 가드너의 최후를 보고도 태연하게 티브이를 보다, 흑인 친구와 캐치볼을 하러 나간다.

숨 가쁘게 달려온 <서버비콘>의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은 가드너인가, 니키인가?

  

<서버비콘>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끝이 허무한 작품이다. 사건이 흐르면 흐를수록 개연성이 아닌 공감능력을 잃어버리는데, 그것의 팔 할은 흑인 가족과 가드너 가족을 비교하는 장면 곳곳에 있다. 초반은 긴장감을 고조하는데 충분히 활용되어 효과를 주었지만, 끝으로 갈수록 그 힘을 잃고 만다. 영화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가드너의 고군분투기만 보여줄 뿐이니까. 모든 것이 한낱 미물일 뿐인 가드너의 착각에 불과했다는 결말로, 찝찝하고도 기분 나쁜 뒷맛을 남기긴 하지만, 그 역시 예상 가능했단 평가로 허무함을 남긴다.  

출처: 영화 <서버비콘> 스틸컷

<서버비콘>을 통해 우린 불완전한 개인의 윤리적이지 못한 욕망의 말로를 경험했다. 옳지 못한 방식과 생각으로 사는 개인의 끝은 정해져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 점.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아내와 아들까지 죽일 수 있는 서늘하고도 무서운 남편의 존재가 우리와 같은 형상을 한 인간이라는 점까지가 적당하겠다. 물론, 인종차별을 겪는 흑인 가족과 비교되게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백인 가족을 공권력 조차 건들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곤 있지만, 그것은 또다시 돌이표일 뿐이다. 미국을 향한. 가드너가 미국을 집약한 인물(진정한 역할을 가진 주인공)로 보이지 않는 이상, 대답할 의무도 의미도 없는 물음이다.


강렬하게 관객의 눈을 몰아붙였던 화려한 색감들이 사라지고, 음침하고 저속한 어두운 색감들이 인물들을 집어삼킬 때 느꼈던 감정들 남아있다. 이 영화가 남긴 매력일 것이다. 차라리 두 가정의 비교가 아닌, 한 가정의(개인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어땠을까란 아쉬움이 남는다. 완벽한 이상향을 추구하며 사는 서버비콘의 개인들이 마을의 위신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가드너의 범죄를 덮어주었다면,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더 한 범죄까지 저질렀다면 지금보다 더 폭발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마치, 가드너가 니키가 아닌 관객을 향해 협박을 하는 것처럼.

출처: 영화 <서버비콘> 스틸컷

명배우들의 열연이 곳곳에 녹아있음은 틀림없다. 단, '개인의 욕망과 불완전한 너의 착각'이란 말속의 담긴 '개인'과 '너'의 지칭을 곱씹어야 한다. 개인과 너는 곧, <서버비콘>이다. 그 사실을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만, 본 영화의 여운을 느끼기에 부담감과 거북함이 없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도 그렇게 될 거야, <허니 보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