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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Feb 12. 2021

전부 다 끌어안은, <살아남은 사람들>

불친절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 Those Who Remained, 2019  

헝가리, 드라마, 83분

감독: 바나바스 토트



전부 다 끌어안은, <살아남은 사람들>




삶의 큰 굴곡을 경험한 이의 지금까지의 인생이 궁금하다면, 그와 대화가 아닌 눈맞춤을 먼저 해야 한다.

시답잖게 주고받는 대답 없는 질문이 아닌, 질문 없는 대답을 위해 침묵 속에서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 일은 대화보다 더 어렵고 난처하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하지만, 주름진 눈가에서 그의 송곳처럼 날카롭기만 한 마음과 굳게 닫힌 입술에서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한 말을 들으며 눈물을 떨구는 건, 그를 깊이 공감해서가 아니다. 완벽하게 그를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허무와 분노, 슬픔과 고통을 어림잡아볼 수 있지만, 왠지 그렇게 퉁치고 넘어갈 일이 아니란 직감에 되려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 먼저 눈물을 훔치는 것뿐이다. "다 이해하니까, 이제 그만 얘기해요."라고 그에게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왜냐고? 우리가 타인의 인생에 관심을 갖는 것들은 그런 무겁고도 엄청한 것들이 아니다. 한 잔의 차와 커피, 맥주를 들고 할 수 있는 가볍고 재미있는 것들이면 충분하다. 그가 겪은 일을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모르니까. 정말 사람들은 자기 얘기 아니고선 큰 관심을 타인에게 두지 않는다.

물론 모름에 대해 부끄럽지 않다고 해서 불손하고 염치없는 사람이 되는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나와 같은' 이가 없어 외롭다는 생각에선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허울뿐인 위로보다 '공감'이 먼저다.

완벽하게, 완전히 공감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깊이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수많은 사건이 아닌 그 사건을 견뎌온 그들의 숨겨진 얼굴과 흔들리는 몸을 바라봐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고통을 보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출처: 영화 <살아남은 사람들> 스틸컷

홀로코스트로 두 아들과 아내를 떠나보낸 의사 알도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한순간에 고아가 돼버린 소녀 클라라가 한 가족이 되는 이야기를 담은 <살아남은 사람들>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다룬다. 클라라와 알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미 그들은 아픈 과거를 갖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란 결과다. 행방불명된 부모에게 매일 편지를 쓰는 클라라와 수시로 떨리는 손을 보며 과거의 고통을 떠올리는 알도에게서 관객이 볼 수 있는 건, 이들의 현재에 드리운 어둠과 묘한 긴장감뿐이다. 따라서, 알도에게 집착하는 클라라를, '안정을 원하는 가여운 소녀'가 아니라 '아빠뻘 되는 아저씨에게 여자로 접근하는 소녀'로 보는 건, 불편하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에서 정말 살아남은 이들은 고작 몇 명뿐이고, 관객을 포함한 나머지 인물들은 살아남는 것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일반인에 불과하다. 가십거리와 오락거리, 그리고 각자의 거창한 미래에 집중한다. 현재 자신들이 통과하고 있는 전쟁의 후유증과 트라우마는 지나가는 열차와 다를 바가 없다. 클라라가 학교 선생님들에게 전부 낙제생으로 낙인찍힌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를 부정하고, 알도에게서 아빠의 냄새를 맡고, 그의 집에서 가족들과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일도 클라라에겐 반드시 필요한 일인 것처럼. 그러나, 이웃의 눈엔 그저 부정한 사랑일 뿐이었다.


클라라와 알도가 진짜 가족이 되어갈 때,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하나 둘 늘어간다. 스탈린의 통치를 받고 있는 시기였다. 한순간에 퍼진 소문으로도 한 사람의 인생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였다. 결국, 영화는 두 사람이 왜 서로의 품에서 안정을 찾고 위로를 받는지를 알려주는 일 대신, 끊임없이 일반인들의 눈과 귀에 집중한다. 참으로 불친절한 이야기 전개 방식이지만, 관객의 집중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  

출처: 영화 <살아남은 사람들> 스틸컷

알도와 클라라의 관계는 클라라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자신이 버림받았다 말하는 클라라의 불안을 잠재우는 일은 함께 사는 고모할머니가 아닌 고작, 한 번 본 의사 알도다. 소녀는 아빠의 품이 간절했을 뿐이고, 사회 구성원으로 크길 거부하는 일은 16살에겐 우선순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클라라의 리스트엔 수업 거부와 낙제는 고려대상으로 들어가 있지도 않다. 딱 하나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런 자신을 그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한다고 왜 창녀죠?"

그것이 클라라와 알도가 사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직하게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만족스러운 클라라를 잡아주는 알도의 존재는 관객의 불안까지 능숙하게 컨트롤한다. 그는 영화 내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무미건조한 말들과 가끔 싱긋 웃는 무표정 말고는 알도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클라라와의 만남 이후로 웃음이 늘어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정적 감정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겉으로만 보면, 말 그대로 속을 알 수 없는 시한폭탄 같은 사람인 셈이다.


늘 '난 괜찮다'는 거짓말이 익숙한 알도. 클라라는 그의 말이 전부 거짓말이란 걸 알고 있지만, 이를 따지지 않는다. 알도에게 거짓말은 그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원동력이었다. 죽은 아내와 아들들이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다는 믿음으로 "난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만큼 대단한 삶이 있을까.

'살아남는 일'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슬픔을 분출하는 순간, 다시 빨아들일 수 있는 강인한 의지가 있기에 가능하다.


알도는 자신에게 집착하는 클라라를 '여성'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클라라의 도를 넘는 행동엔 단호한 말과 행동으로 옳지 않음을, 잘못됐음을 직접 보여준다. 마치, 자신의 아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쳤던 것처럼 수양딸로 삼은 소녀에게 아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아니, 이미 그에겐 당연하게 해야 하는 일이었다.

클라라를 사랑하고, 그녀가 자신을 향한 마음 역시 다르지 않음을 끊임없이 확인시켜주면서,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한 여자 환자에게 다가간다. 그는 클라라에게 '용기'를 배운 아빠였다.


"그들을 숨 쉬게 오직 사랑이었다."

'사랑', 영화 포스터를 수놓은 그 딱 구절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두 설명하고 있음을 이젠 관객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사랑. 그들을 숨 쉬게 한 건 사랑이었으나, 하나로 묶은 건 고통이었다.

출처: 영화 <살아남은 사람들> 스틸컷

가족을 한순간에 빼앗기고 잃어버린 아픔.

클라라는 입 밖으로 꺼내는 방법을 택했지만, 알도는 침묵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스펀지처럼 서로를 받아들였고 공감했으며, 마침내 가족이 된다. 말하는 이유와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같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섬세한 연출과 가슴을 찌르는 송곳 같은 미장센이 폭발하는 장면 역시, 그 부분이다.


알도의 고통을 그의 가족사진 앨범만으로 깨닫는 클라라를 담은 한 장면.

알도가 남긴 편지 속 열쇠로 가족사진 앨범을 꺼내 본 클라라는 흑백 사진에 담긴 그의 환한 웃음과 그의 어 두 아들과 아내를 본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소녀에게 한 줄기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카펫을 비춘다. 앨범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그대로 카펫으로 엎어지는 클라라. 그녀의 감은 두 눈에 햇빛이 드리운다. 어둠도, 그림자도 아닌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밝고 따뜻한 빛이 클라라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그녀의 가족에게로 인도한다. 그 짧은 순간, 클라라는 엄마와 아빠, 어린 동생을 만난다.

알도의 고통은 곧 소녀의 고통이었고, 소녀의 고통은 곧 그녀와 같은 수많은 이들의 고통이었다.


알도의 가족사진과 클라라의 눈물과 햇살만으로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힘.

3년 후,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완전한 가족이 된 이들이 술잔을 부딪치는 마지막 장면.

매번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해피엔딩을 너무나 조심스럽고 어렵게 완성한 <살아남은 사람들>.


스탈린이 죽었던 라디오 방송을 듣고, 울컥해 무너질 뻔한 알도에게 미소를 짓게 하는 클라라.

가족들에게 스며들어 환하게 웃는 알도, 클라라의 번쩍 안아 들고 환호하는 연인 페페, 그리고 함께하는 모든 시간은 견디며 살아온,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모든 장면이 완벽했다.

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어른스러운 클라라의 마지막 옆모습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관객의 눈이 아닌 마음을 먼저 사로잡았다. 망설임없이 꽉 끌어안아줬다.

침묵을 가장해 끊임없이 의심했던, 완전히 공감하지 못해 그들의 주위를 겉도는 사람들까지 전부 다.

출처: 영화 <살아남은 사람들> 포스터

 




PS.  이 글의 일부는 '전주영화제작소/관객동아리 리뷰 게시판'에도 업로드 되어있습니다. 전주 독립영화관 관객동아리 '씨네몽'회원으로 개봉작(무료)을 본 후 리뷰를 올리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http://www.jeonjucinecomplex.kr/board/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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