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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스톱-젬리아>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 / '판단'과 '훈수'는 필요 없다

by 우란

*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온라인 및 오프라인 상영작)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톱-젬리아, Stop-Zemlia (2021)

우크라이나, 드라마, 122분

감독: 카테리나 고르노스타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스톱-젬리아>



난 자주 입을 닫았고, 이유 없이 화를 냈다. 방구석에 앉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다음날 아침을 맞이한 적도 있다. 매일 같이 문 하나를 두고 아빠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딸이 걱정돼 미치겠는 아빠에게 "냅둬!"라고 소리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사력을 다해 문을 열지 못하게 막던 딸의 힘을 거뜬히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문고리만 잡은 채 한숨을 쉬던 그의 목소리까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날 잠식했던 때였다. 명확히 단정할 수 없던 존재가 셀 수 없을 정도의 가면을 만들어 날 꾸준히 미치게 했던 시기.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걸 하고 싶고, 어떻게 살고, 누구와 함께 나누고 싶은지도 고민이었지만, 대체 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알면서도 꼬인 매듭을 풀듯 계속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왜 그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정말, 말 그대로 모든 것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당시의 난 새로운 가면을 통해 느낀 '감정'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뭐 하나 속 시원하게 결정하고 행동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늘 나의 시계는 행동이 아닌, 행동하기 직전에 가졌던 복합적인 생각과 감정에 의해서만 작동했다.

공포, 불안, 질투, 행복, 우울, 수치, 설렘, 사랑, 불만, 재미...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한 번에 압축하는 기계가 내 심장 바로 옆, 명치 바로 아래에 위치해 꾸준히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쓰레기를 내 몸 밖으로 배출해 본 적도 없었다. 스스로 쓰레기라 불렀지만, 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전부 '나'의 파편이자, '또 다른 나'란 완전체였기에 부정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스톱-젬리아>는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지금에서야 '평범했다' 말할 수 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기.

출처: 영화 <스톱-젬리아> 스틸컷(다음)

마샤와 샤샤가 영화 속 주인공으로 사건을 이끌지만, <스톱-젬리아>의 주인공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십 대 청소년이다. 사건 전개와 이야기의 몰입도를 위해 마샤와 샤샤의 사연이 각각 등장할 뿐이다. 마샤와 샤샤의 친구들 역시 각자의 결핍과 트라우마, 고민을 갖고 산다. 영화 중간중간 삽입된 이들의 인터뷰가 <스톱-젬리아>의 또 다른 초점이자, 가장 강조하고 싶은 시선이다. 따라서 누굴 주인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영화의 감상도 달라진다. 이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마샤와 샤샤의 이야기와 별도로 짧게 펼쳐짐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주인공 두 사람과 다름없이 이들을 본다. 그리고 깊이 공감한다. 분명히 나완 다른 삶을 겪고 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흐르던 시간 속에서 맨몸으로 '각자의 현실'을 넘어온 우리가 아닌가.

그날의 감정, 그때의 느낌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목놓아 울기도, 숨죽인 채 허공을 바라보기도 했을 테니까.


<스톱-젬리아>는 공식처럼 도식화된 극적이고 자극적인 사건들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매력적인 작품이다.


<스톱-젬리아>엔 열일곱 살 고등학생들의 은어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영화의 시작이 그들의 새로운 사건 시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상을 사는 그들의 삶을 관객이 몰래 커튼 뒤에서 숨어 훔쳐보는 것, 그것이 본 영화의 일관된 연출방향이다. 따라서 그들의 일상을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영화에 빠져들 수 없다. 인물들을 향한 애정이 담긴 눈빛은 고사하고, 일관된 마음으로 끝까지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마샤는 그런 아이구나.'란 생각 정도가 적당하다. 마샤와 친구들에게 우리의 '판단'과 '훈수'는 필요 없으니까. 그때의 우리처럼 말이다.

출처: 영화 <스톱-젬리아> 스틸컷(다음)

주인공 마샤에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하는 단짝 친구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야나와 총격사건 경험한 뒤로 총소리에 트라우마를 가진 세니아가 있다. 이 두 친구가 존재하기에 마샤의 세상은 언제나 무탈하다. 아니, 무탈했었다. 마샤가 지독한 짝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같은 반 남학생 샤샤를 좋아하고 있는 그녀는, 수업시간에 샤샤를 훔쳐보고, 거리에서 샤샤에게 슬쩍 인사하고, SNS에 뜬 샤샤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며 짝사랑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한다. 샤샤에게 고백할 법도 한데, 그와 제대로 된 대활 해본 적이 없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자신과 그가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모든 친구와 어울리는 소위, '잘 나가는' 그룹의 리더를 맡고 있는 샤샤와 조용하고 내성적인 마샤의 간극은 너무나 크다. 나아가 반 안에서 마샤의 짝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샤샤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마샤의 눈빛을 알고 있다. 그저 모른 척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마샤는 혼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거다.


마샤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다른 졸업생들처럼 자신의 미래를 고민한다. 대학교 입시 공부를 하고 있지만, 합격이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현실을 알고 있다. 하여, 되는 대로 산다. 방에 틀어박혀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고, 배드민턴을 치고, 가끔 두 친구와 한 침대에서 수다를 잠을 자고,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는 일이 전부지만, 현재 마샤가 하는 가장 생산적인 행동들이다. 그리고 짝사랑까지.

그런 마샤에게 돌연 띵동-, SNS 메시지가 날아온다. SNS 아이디 '구룸 74'.

마샤는 정체불명의 구룸 74를 경계하면서, 그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출처: 영화 <스톱-젬리아> 스틸컷(다음)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스트레스 반응과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수업시간에 들은 선생님의 말에 마샤는 공감한다. 무관심보다 짝사랑이 더 사람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도 진작에 깨우친 그녀였다. 그러나 마샤는 사랑하는 감정이 자신의 중요한 일부임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매일 샤샤를 생각한다.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도 고민이지만, 샤샤를 향한 마음이 가장 열성적으로 불타고 있었으니까.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샤샤에도 마샤는 자신의 온몸을 뜨겁게 하는 느끼는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당사자 샤샤에게도 남모를 고충이 있다. 그는 자신이 대체 뭘 하고 싶은지 몰라 미칠 지경이다.

공부는 하지만,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르겠다. 그가 시력이 좋지 않음에도 안경을 고집스럽게 쓰지 않는 이윤 바로 '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명확히 보이지 않을 바엔 아예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샤샤는 엄마와의 대화는 철저히 거부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대마초, 담배, 술에 거리낌 없이 손을 댄다. 방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느끼며 찾는 마샤와 달리 그는 가장 자극적이고 가학적인 놀이 방식으로 현재의 자신을 잊으려 한다. 인터뷰에서 드러난 엄마와의 관계가 주된 원인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앞에서만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는 아들 때문에 가슴이 메말라가 못해 찢어지고 있는 엄마의 초췌한 얼굴만 보일 뿐이다. 대학 진학에 확신이 없는 샤샤는 삼촌과 마음대로 자신의 미래를 마음대로 설계하는 엄마에게 개나 소나 가는 군대를 가겠다고 말한다. 반항심에 욱하고 튀어나온 말이었으나, "넌 안 뽑을 걸, 네 삶과는 안 맞으니까."란 단호하고 뾰족한 말을 듣고 만다. 항상 이런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했을 모자였다.

그러니, 샤샤에게 사랑은 마샤가 느끼는 사랑과 그 시작점부터 달랐다.

더구나 나도 날 모르겠는데, 그녀가 날 좋아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조용하고 내성적인 삼총사(마샤, 야나, 세니아)와 활달하고 외향적인 샤샤의 모임의 일상은 판이하다.


삼총사의 하루는 마샤의 독립적이고 폐쇄적인 방 안에서 주로 소꿉놀이처럼 지나가지만, 샤샤 패밀리의 하루는 파티에서 시작해 파티로 끝난다. 지독하게 한 친구를 괴롭히는 짓도 '장난'이란 말로 무마하고, 친구들끼리 게임의 일환으로 감정 없는 키스를 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이탈하고 싶은 욕구가 강할수록 샤샤 패밀리의 위험한 일탈 역시 수위가 높아진다. 문젠, 이를 마샤가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엔 완전 다른 두 그룹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부 착각이었다. 그들은 반드시 잊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기에, 이를 위해 못할 일이 없었다.

출처: 영화 <스톱-젬리아> 스틸컷(다음)

마샤는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구룸 74'의 친밀하고 수수께끼 같은 메신저에 뜬금없이 샤샤를 떠올린다. 그리고 더 깊이 외로움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럴 때마다 마샤의 짧은 환각이 튀어나온다. 어둠 속에 홀로 배드민턴 채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녀의 뒷모습과 상대가 없는 반대편에 배드민턴 공을 넘기는 마샤의 상기된 얼굴이 반복된다. 마침내, 마샤는 환각에 벗어나자마자 샤샤 패밀리와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다.

친구의 짝사랑을 돕기 위해 야나가 고집을 부린 것이지만, 어느새 마샤는 맥주병을 세워놓고 그 앞에서 눈을 감은 채, 술래가 되어 맥주병을 쓰러트리지 않고 누군가를 잡기 시작한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견뎌가며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시간만 의미 없이 흘러가자, 대뜸 "스톱-젬리아!"라고 외치는 마샤. 영화 시작점에 샤샤 패밀리의 대사로 처음 나온 후, 두 번째로 언급된 영화 제목이다. "Стоп-Земля", 영어로 하면 "Stop-Ground", 한국어로 말하면 "정지, 멈춰."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다 사라진다.

샤샤의 세계에 발을 들인 마샤에게 돌아오는 건 없었다. '구룸 74'의 정체도, 샤샤의 마음도, 자신의 미래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마샤. 그녀는 결국 샤샤 패밀리와 다를 바 없는 위험한 장난을 시작한다. 각자의 고독과 외로움에 싸우던 삼총사는 손목을 면도칼로 긋고 서로 피를 맞대 문지르며 우정을 견고히 하고, 세 명이서 하나가 되기 위해 돌아가며 키스를 한다. 마침내 그들이 하나가 됐을 때, 마샤의 맞은편에 세니아가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서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마샤의 짝사랑이 막을 내렸을까? 아니, 마샤는 아예 피아노를 치는 샤샤의 유일한 관중으로 관객석에 서 있다가 대뜸 나체로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그를 껴안는 상상까지 한다. 샤샤를 생각할 때마다 등장하는 그녀의 짧은 환각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부풀어 마침내 터져버린 것이다.

출처: 영화 <스톱-젬리아> 스틸컷(다음)
용기 내면 자신을 더 잘 알게 돼.

졸업을 앞두고 학교 지하에서 열리는 디스코 행사에 참여한 마샤는 마지막 곡을 남겨둔 채 그룹 74에게 속마음을 고백한다. 원하는 게 있지만 그게 두렵다는 마샤의 말에 그룹 74는 그녀에게 용기를 낼 것을 조언한다. 때마침 세니아도 샤샤가 거절은 하지 않을 거라면서, 같이 춤을 추자고 말하라고 제안한다. 자기가 마샤를 좋아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짝사랑을 위해 한 발 뒤로 물러난 것이다. 아무리 친해도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피로 맺은 삼총사에게도 존재했다. 샤샤는 마샤의 춤 신청에 흔쾌히 응한다. 비로소 샤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러나 마샤에게 돌아온 건 차디찬 각목이었다. 뻣뻣하게 선 채로 긴장과 설렘이 가득 찬 마샤의 눈을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보는 샤샤. 정확히 눈빛 만으로 마샤에게 '너에게 난 관심 없어.'라 전달한 샤샤에, 마샤는 곡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돌아서 도망치듯 야나와 세니아의 품에 안긴다. 마샤를 말없이 안아주는 두 사람에게서 같은 아픔과 분노가 느껴졌고, 마샤는 이제 내가 갖고 있던 쓰레기를 모두 털어내야 함을 받아들인다. 이후 홀로 집 앞 공터 의자에 앉아 '구룸 74'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다.

샤샤 너야?

메시지를 보내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자신의 손목을 보는 마샤. 면도칼로 그은 그녀의 손목 안쪽에서 피가 아닌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점차 걸쭉해지면서 벌레가 기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다가, 이내 별빛을 담은 듯 반짝반짝 빛을 내는 그것. 끝없이 마샤의 손목에서 주르륵 빠져나오는 그것은 그녈 미치게 했던 고민이었고, 끊을 수 없던 사랑이었으며, 알 수 없던 자신의 어둠이자, 갈피를 잡지 못했던 그녈 품었던 우주였다.

내가 압축하고 압축해 내 몸 곳곳에 숨겼던 쓰레기와 같은.

아니.

구룸 74의 대답에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마샤. 그녀는 자신에게 해 줄 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숨죽인 채 읊조린다. "Стоп-Земля"

출처: 영화 <스톱-젬리아> 스틸컷(다음)

각자 인생의 첫 과도기에서 빠져나오는 친구들이 차례로 보이면서, <스톱-젬리아>는 그들의 혼란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마샤는 마지막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조금은 달라졌음을 고백한다. 두려움을 덜 느끼게 됐다는 말과 함께, 자신을 두렵게 했던 것들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못 박는다. "스톱-젬리아!"를 외친 순간, 자신을 좀 먹던 불안감을 제거할 수 있는 실질적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시간의 흐름을 막아선 채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고민하는 일만큼 의미 없는 짓은 없다는 걸.

너무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면, 정작 중요한 '나'를 찾지 못한 채 길을 헤매게 된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고민과 생각을 멈추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 때가 반드시 온단 현실을.


그때의 나도 궁금했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어른이 되어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치열했던 나의 흔적들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을까. 그 경험들을 곱씹을 때마다 똑같이 괴롭고 아프고 슬플까. 답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 쓰레기들만 생각하면, 온몸의 세포가 빠르게 반응해 부르르 떨기 시작하지만, 절망스럽지 않다.

피식, 헛웃음이 나오거나 나조차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마지막 단체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선 마샤와 친구들의 얼굴에 담긴 작은 미소처럼. 그건 미래를 향한 희망도, 과거를 향한 후회도 담기지 않은, 하지만 확실히 전과 달라진 '현재의 나를 향한 다짐'이 틀림없다.


그들은 이제 겨우 한 발짝 나아갔다. 하지만 그 작은 한 뼘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스톱-젬리아>는 지독하게 아팠음에도 쉽게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음을 확인시켜줬다. 아주 고맙게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유를 찾아야만 해요. 오직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이 제 이유예요.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죠. 전 지금 존재하고 그걸 이용해야 해요.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죠. 이미 끝났거나 아직 할 수 없는 일 말고요.


역시, 그때의 날 잊는 건 불가능하다. 대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정없이 휘둘리는 내 목을 움켜쥐고, 똑바로 서서 날 완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 첫 걸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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