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 <결혼 이야기> , 그리고 다시 삶을 생각하며
* 본 리뷰에는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혼 이야기 Marriage Story, 2019
감독: 노아 바움백
‘다시 삶’을 위해, <결혼 이야기>
남편 찰리와 아내 니콜은 이혼을 앞두고 있다. 어린 아들을 위해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최선의 방식으로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마치 신사와 숙녀처럼 교양 있고, 기품 있게 각자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아름다운 이혼은 거의 없다. 그들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혼 이야기>는 '어떻게 악착같이 이혼하는지'를 담은 작품일까. 아니다. 이 영화는 좀 특별하다. 부부의 파탄 난 사랑을 확인하고, 둘을 완전히 분리하겠다는 목적 보다, 그들이 앞으로 있을 새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다시 힘 있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일에 집중한다. 즉, ‘다시 삶’을 위해 이혼을 진행하는 ‘결혼 이야기’다.
시작은 독특하면서 애틋하다. 니콜과 찰리는 결혼생활을 하며 느꼈던 상대의 장점을 얘기한다. 니콜의 목소리에 찰리의 생활이 그려지고, 찰리의 목소리에 니콜의 일과가 보이는 식이다. 이들의 고백은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따뜻하다. 담백한 어조 안에 서로를 향한 끝없는 애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담사가 두 사람 사이로 등장하는 순간 관객을 홀렸던 ‘콩깍지’가 확 벗겨지면서, 서로를 더는 이해할 수 없는 니콜과 찰리의 본심이 드러난다. 그렇다, 그들의 관계는 진작 끝났다. 서로의 장점은 관객만 들었을 뿐 사실 둘은 듣지도 못했다. 곧 남이 될 부부가 이상적인 끝맺음을 위해 나름의 타협점을 찾고자 하지만, 애초에 그들에게 모두가 만족할 만한 조건은 없었다. 니콜은 찰리와 이혼해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며 ‘나’ 답게 살기로 마음먹었고, 찰리는 그런 아내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다. 아, 정확히는 아내가 선택한 삶을 고려는커녕 거부하는 중이다. 영화는 두 인물을 뜯어보는 것으로 ‘다시 삶’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부부가 끝까지 서로에게 감추고자 했던 마음을 들춰내고 고백하게 한다. 초반에 관객의 콩깍지를 벗겼듯이 말이다.
남편, 찰리는 평생 실험적인 연극을 연출해 온 베테랑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극단 감독이다. 아내, 니콜은 찰리가 기획한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다. 사실 그녀는 과거 유명 영화에 출연한 뒤로 스타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찰리와 사랑에 빠져 고향을 떠나 오롯이 그를 위해 살아왔다. 단호하고 창의적인 찰리와 배려심 넘치고 용감한 니콜의 만남으로 극단은 빠르게 예술계에 자리 잡았으며 나아가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는 쾌거까지 이뤄냈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직업적 공든 탑’이 더 높아질수록 찰리와 니콜은 멀어졌다.
니콜은 찰리가 연출가로 엄청난 명성과 명예를 쌓아갈수록, 한없이 작아졌다. 그의 그림자에 갇힌 채 ‘나’는 물론 ‘아내’란 정체성도 잃어갔다. 니콜은 유명한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를 고용해 그동안 해왔던 부부 상담을 가장한 ‘이상적인 이혼’을 때려치우기로 결심한다. 노라의 말처럼 니콜은 이혼이란 '희망찬 행동'을 통해 ‘다시 삶’을 얻어야 했다. 반면 찰리는 니콜이 좋은 기회(캐스팅)를 빌미로 아들과 고향에서 계속 살겠다고 말하자, 당황한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니콜이 본인의 극단과 예술적 사상을 가장 최우선으로 여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극단 여직원과의 불륜이 부부간의 신뢰는 물론 간신히 잡고 있던 니콜의 이성마저 놓게 했다는 것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찰리는 니콜 말대로, 너무 이기적이라서 본인이 이기적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양육권 사수를 위해 기존의 변호사를 노라만큼 유명한 변호사로 교체한다. 이후 벌어지는 두 사람의 이혼 과정은 짐작한 대로 비참하고 격렬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이혼’을 빌미로 모욕과 치욕을 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변호사들이 부부의 사생활을 까발리듯 공개하고 재판에 교묘하게 이용할 줄도, 아니 그렇게까지 힐난하고 불쾌하게 할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토록 불편하고, 마음먹은 것보다 훨씬 더 가슴 아플지 몰랐다.
그 누구도 쉽게 결혼하고 간편하게 이혼할 수 없다. 어떻게 단칼에 무 자르듯 결혼을 가르고, 이혼이란 화살을 과녁 한가운데에 명중시킬 수 있을까. 결혼과 이혼 사이에 부부가 함께한 시간과 추억이 존재하는 한, 참 어려운 일이다. 니콜과 찰리는 싸우면서도, 이따금 그들 자신도 모르게 ‘부부’만이 가능한 행동들로 서로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오랫동안 함께 해, 몸과 마음에 벤 그들만의 습관과 규칙은 이혼이란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모래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일례로 니콜은 항상 찰리의 머리를 직접 잘라줬는데, 이는 이혼 조정 중에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결혼 이야기>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일상이 이혼 과정으로만 채워지길 거부한다. 왜 제목이 ‘이혼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 이야기’이겠는가. 특히 극 후반부에 펼쳐지는 찰리와 니콜의 극단적인 논쟁은 제목에 힘을 더 실어준다. 그들은 비난과 울분, 선택과 후회, 만남과 헤어짐, 결심과 허망 등, 지금까지 혼자 감췄던 마음들을 토해내며 마침내 함께 무너트린 우리의 현실을 직면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과거의 잔해인 동시에 미래의 연료이자 현재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처참히 무너진 벽돌집 앞에 서서 다시 벽돌을 쌓기 시작한다.
<결혼 이야기>를 이끄는 중심축은, 부부의 격렬한 충돌이 아닌 이혼 과정을 겪는 니콜과 찰리의 ‘일상’이다. 두 사람에게 이혼은 일상을 흔드는 강력한 바람일 뿐, 삶을 뒤집는 태풍은 아니란 점이다. 이혼을 마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더 돋보이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격돌은 모두의 기대(?)와 달리 성난 파도처럼 널뛰다가도, 평화로운 파도에 몸을 맡긴 듯 잔잔하게 흘러간다.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온갖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다시 삶’의 윤활유로 삼는 이야기. 이 이야기의 종착점은 출발점과 연결된다. 서로를 설명하던 첫 장면이 결말에서 이어지는데, 그때 찰리는 니콜이 쓴 글을 읽으며 울컥하고, 니콜도 그를 보며 같은 의미의 눈물을 흘린다. 그들에게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흘러나오고 이윽고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보일 때, 아주 긴 여운이 우릴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