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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함을 감추다 / 송재학 시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142 ©송재학, 1994,『푸른빛과 싸우다』

by 우란

격렬함을 감추다 / 송재학



1

나는 바다를 달래려 합니다 어리석은 줄 알면서 해 뜨는 바다를 급히 보러 왔습니다 영산홍이 꽃피어 며칠을 대신 버텨주기도 했습니다 그 붉은 꽃이 시들기 전 도망치듯 이곳에 오고야 말았습니다 영산홍 밖에 나오면 무엇도 감추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의 온갖 것들과 저 아래 시퍼런 바다는 같은 수평선에서 시작된 아우성임을 깨닫습니다 내 격렬함을 통과하던 영산홍의 만개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2

영산홍 가득 핀 세상이란 얼마나 답답합니까 가장 붉은 꽃 한 송이 꺾어 화병에 꽂았습니다, 아닙니다 이 꽃은 역시 제 붉음이란 운명 사이에 휩싸여야 합니다 그것은 영산홍의 오랜 비밀입니다.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142

©송재학, 1994,『푸른빛과 싸우다』

77쪽


나는 그래


그 순간을 기억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내 바다에도 영산홍이 가득 피었다

이 붉은 파도와 저 붉은 파도가 부딪치는 세계 안에서 나는 휩쓸리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고

마음이 시들고 열정이 사그라드는 시간 속에서
감출 수 있는 첫 붉음을 생각한다

분명히, 누구에게나 감출 수 없는 운명이 있다
도망치듯 영산홍의 만개를 통과하고 나면
누구든 깨닫는 순간이 오고
'바다를 달래려'는 마음에 결코 무성할 수 없음을
비로소, 온전히 수긍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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