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숨어 있는 죽음들

내일 쓸쓸한 가운데 술에서 깨고 나면

by 알이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꽃이 떨어질 때마다 술을 마시자면 가을 내내 술을 마셔도 모지랄 일이겠지만, 뭇꽃이 무수히 피어나도 떨어진 그 꽃 하나에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음날 쓸쓸한 가운데 술에서 깨어나면 알게 될 일이다.


그동안 허공 속으로 흩어진 내 숨결들 그처럼 내 삶의 곳곳에 있는 죽음들. 가끔 그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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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자습 시간이었다. 옷 속에 이어폰을 숨겨서 몰래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뉴스에서 배우 이은주가 죽었다고 했다. 순간 놀라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몰래 라디오를 듣고 있던 친구도 놀라 고개를 들어 서로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말을 할 수 없어 눈으로 얘기를 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끔 그런 소식들을 접할 때가 있지만 여느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연예뉴스 중에 하나로 넘기거나 왜 그랬을까 찰나의 생각을 하고 그저 넘어갔다. 그때는 소식을 접한 상황이 특수해서였을까 지금까지도 그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한 사람이 슬픔의 무게를 감당 못해 생을 버렸는데 거기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순간. 다시 고개를 숙이며 그의 고민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래를 생각하며 공부를 하고 있는 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라디오도 잠깐의 꼭지로 다룬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다시 정석 책을 향해 고개를 숙였지만 고개를 들기 전과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만큼의 세상이 사라졌다는 걸, 그럼에도 나머지의 세상은 너무도 빨리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것을, 나조차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180625_165102.jpg 하늘을 걷다 김점선 作


대학 3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나는 휴학을 할까 말까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사실 휴학을 하는 걸로 결정해 놓고 절대 반대할 엄마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생각 중이었다. 그리고 1월이 되면 새로운 마음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하자는 어처구니없는 마음으로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었다. 전공 서적만 겨우 읽던 나는 지겨운 마음에 그 정반대의 책들, 내 성적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 할 것 같은 책만 찾아 따뜻한 전기장판에 드러누워서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깨 목 허리가 저려 감히 할 수도 없을 희한한 자세로 뒹굴 거리며 읽었다. 학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살았으면서 도서관에 왔다 갔다 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양인 5권을 꽉 채워 빌려서 가곤 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마냥 책 고르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으로. 그 날 류시화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900쪽이 넘는 책을 빌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나머지 4권은 얇은 책으로 골라야 했다. 단지 얇은 책만 찾다 보니 찾게 된 게 김점선 씨의 10cm 예술이었다. 오십견이 와서 큰 화폭에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서 컴퓨터에 마우스로 그린 그림들과 본인의 단상들을 엮어 낸 책이었다. 얇기도 해서 그 자리에 서서 거의 다 읽을 뻔했지만 집에 와서 다 읽었다.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내용도 아주 재미있었다. 내가 잊고 지냈던 대학 와서 하려던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드디어 교복 생활이 끝났다. 나는 폭발하듯이 헝클었다. 머리를 빗지 않고 단추도 채우지 않고 구겨진 옷을 입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녔다. 드디어 미쳤다고 소문이 났다. 옷을 사 입으라고 주는 돈은 필름을 사서 영화를 만들었다. 나중에 엄마는 내게 돈을 안 주고 양장점 주인에게 직접 돈을 맡겼다. 한꺼번에 몇 벌의 정장이 생겼다. 학교 갈 때 입고 가서 라커룸에 처박았다. 얼마 후 물감과 함께 옷을 몽땅 도둑맞았다. 속이 시원했다.

-10cm예술 중에서


나는 엎드려서 읽으며 흐흐하고 웃었다. 나도 대학 와서 폐인처럼 열심히 건물 스케치하고 설계하고 그래야지 그런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그런 내 다짐과는 별개로 대학 오자마자 1달 만에 모두가 하지 말라고 말하는 CC를 했고 전공은 학사경고를 맞았고 전공 공부를 못 할 것 같아서 휴학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 얇은 책은 모든 부분이 너무 재미있어서 돈을 벌게 되면 꼭 소장하리라 다짐했다. 그 후로 나는 김점선의 책들을 모두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휴학을 하고 돈을 벌고 있던 그다음 해 봄 김점선이 죽었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봤다. 나의 휴학에 죄책감을 날리고 자유를 부여해 준 사람인데. 책을 읽을 때 진짜 재밌다 이 책 좀 읽어봐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걸 혼자서 흐흐 웃으며 읽은 바람에 내 주변에는 김점선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와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 책을 읽고 또 읽어 잘 아는 지인의 소식인 듯 황망했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인터넷 기사를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유언이라도 들은 마냥 난데없이 머리를 잘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망설이던 베이비펌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격하게 나의 자유의 표현을 거부하는 바람에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길러버리긴 했지만. 역시 한국에서는 자유롭게 살기 힘들다. 나는 다시 복학해 4학년이 되었고 자유롭지 않아졌지만 자유롭지 않은 때에 내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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