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분의 감정이 하는 일

은은 고령 사람인데

by 알이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어와 갈피를 덮는 일은 요 몇 년 새 얻은 버릇이다.


세상에 이런 책도 쓸모가 닿는 곳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쓸모라는 게 결국 내 가슴을 울리는 일이었나 보다.


그 열 글자 속에 숨은 스물여섯 살의 회한과 아쉬움과 슬픔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 다 내 몫이다.


목이 메고 마음이 애잔해지는 것은 모두 늦여름 골목길에 떨어진 매미의 죽은 몸처럼 자연스럽게 생기는 여분의 것에 불과한데 ~ 자꾸만 그런 것들에 목이 멘다.



읽다 보니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던 때가 생각났다. 청춘의 문장 플러스를 읽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기억하고 있을 때여서 서점에서 그 소설을 봤을 때 저절로 손이 갔다. 제법 쌀쌀하고 추운 때였고 집에서 무려 박스채로 보내준 엄마가 아주 달고 맛있다고 강조한 고구마가 곯기 직전이라 깨끗이 씻어 프라이팬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그 약불 앞에서 향기와 온기를 느끼면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제목만 보고 사 온 거라 더 궁금했고 집중했다. 고구마를 두세 번 뒤집으면서 나는 언젠가 가보았던 경남과 전남 그 어딘가 사이를 배경으로 딸의 여행을 따라 분노하고 궁금해하고 그녀의 남자 친구를 안쓰러워했다. 어느새 고구마가 다 익어 고구마를 까먹으며 내가 만든 배경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정지은의 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마지막 나는 목이 메고 마음이 애잔해졌다. 아주 달고 맛있는 고구마는 다 먹지도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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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 오던 날 새벽 아빠를, 아빠의 동료를 살려 달라고 가파른 언덕 위의 양관을 향해 뛰어가던 정지은의 너무도 불안했을 두려웠을 마음이, 온몸의 피를 다 빨아들일 듯 뛰는 심장이 자꾸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후에도 나는 출근하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경남과 전남 사이의 어딘가 사진을 보다가, 정지은과 비슷한 이름을 보다가 그 날 숨차게 언덕을 뛰어 올라가던 지은을 떠올리며 문득 목이 멘다. 지은은 영원처럼 그곳을 뛰어올라가고 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내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 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
제2부 지은 중에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어찌해도 기회가 있다. 사과할 기회 변명할 기회 하다못해 다음으로 미룰 기회라도. 닿을 수 없는 곳에 가버린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딸은 비로소 과거를 바로잡아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지은은, 딸을 안아 줄 팔이 없는 딸을 바라볼 눈이 없는 체온을 느낄 수 없는 심장이 없는 지은의 아픔은 어떻게 안아 주어야 할까. 그러면 나는 또 목이 멘다. 소설일 뿐인데 그렇게 마음 쓸 필요 있나 하지만 내게도, 누군가에게도 지은의 기억이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딸의 기억이 있기에 이 소설이 지어졌다. 아무에게도 없는 이야기는 없으니까.


그즈음 신문에 지은의 아버지 사건은 단신으로 실렸을 것이다. 지은의 노력은 실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신문기사의 몇 문장만으로 지은의 아버지를 그들의 머릿속에서 단죄하고 잊었을 것이다. 그 단신이 담을 수 없던, 담으려 하지 않았던 지은의 슬픔을, 절실함을 알려주려 하는 것 그게 ‘여분’ 일 뿐인 감정들이 모여하는 일이 아닐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혼자임에 상처받는 날 그 여분의 감정들이 모여 그 상처의 시림을 감싸 줄 수 있음을,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도록 100번의 시도 끝에 1번이라도 닿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서로를 조금 더 따뜻하게 해줄 수 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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