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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Apr 04. 2020

피상적인 관계 앞에서

도망치고 싶은 못난 마음 





“지각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나 봐.” 항상 일찍 오는 친구가 말했다. 만날 때마다 늦는 친구가 일찍 오니 평소에 일찍 오던 친구들이 늦고 있었다. “그러게. 생전 안 늦던 애들이 늦네.” B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생각이라는 건 친구의 의견과 반대인 건 아니고 단순히 대화 주제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이 모임의 기원에 대한 생각. 대체 왜 이렇게 모이게 된 건지에 대한 생각. 이 모임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의 모임이다. 언젠가부터 매년 2~3번은 만나고 있다. 결혼한다고 청첩장 준다고 만나고 결혼식 때문에 만나고 이렇게 오늘처럼 못 본 지 오래라고 카톡방에서 누군가 말을 꺼내면 날을 잡아 만나면 일 년에 두세 번쯤 보게 된다. 그 카톡방에는 8명이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 그중에는 같은 반일 때도 대학에 와서도 B와 개인적인 교류가 거의 없었던 사람이 절반 정도 있다. 오지랖이 넓은 한 친구가 연락이 닿는 친구들을 한 두 명씩 연락해서 자연스럽게 모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어쨌든 같은 반이었고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대학 때는 다들 사는 방식도 비슷하고 관심사도 비슷하고 하는 짓도 비슷하니까 가끔 만나서 대화를 해도 이질감이나 거리감을 느낄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냥 떠들었다. 


그러다 대학 졸업하고 바빠지면 서서히 만나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하는 친구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이 모임이 끝나지 않고 계속 연장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B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아주 큰 일일 텐데 이토록 얕은 관계인 내가 가도 되나. 아니, 솔직히 가기 싫다는 감정이 정확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딱히 마음이 쓰이지도 않는데 단지 시간이 맞아서 1년에 두 어 번 만난 것만으로 축하한다고 청첩장을 받고 축의금을 내고 단체 사진에 서 있어야 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때부터 이런 친구들과의 관계를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궁금했다. 친구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은 아닌 관계. 만나고 싶지 않으면 만나지 않으면 되는데 굳이 관계를 다 끊기에는 너무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굳이 만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굳이 만나고 싶지도 않은 희한한 관계. 설명하기에는 깔끔하다. 고등학교 동창. 이런 미묘한 감정은 누군가의 결혼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모임을 만든 장본인인 친구에게 가끔 소식만 듣던 A가 처음 이 모임에 꾸준히 나오게 됐을 때 B는 또 한 번 그 모임에 나가고 있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B는 대학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졸업도 취직도 겨우 했다. 물론 아무도에 가까울 정도 적은 사람이 전공 관련 직종에 취직한다고 하지만 b는 찬란할 줄 알았던 자신의 20대 중반이 이렇게 쪼그라들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까도 생각했다. 그때는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뭐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지 이내 공무원 시험보다는 약대 편입에 관심이 갔다. 어찌어찌하면 회사를 다니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수백만 원짜리 인터넷 강의를 끊어 놓고는 집에 오면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때 A가 이 모임에 처음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동안 친구들을 만나지 않은 이유는 약대 편입 공부 중이었다고 하면서. A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왠지 공부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B는 대화에 제대로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입을 닫고 수많은 말과 말 사이에 끼어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멍하니 땅을 차며 걸었다. A가 부러웠고 또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그리고 하나도 지키지 못했던 계획을 세우던 처음 그 순간을 떠올렸다. 왜 약대 편입을 하려고 했던 건지? 정말 원했던 것이 그런 건지? 그저 그런 사람, ‘다들 그렇게 살아.’의 다들이 되지 않으려고 시작된 계획은 스스로의 무력감에 치이고 현실에 치이다 B를 누구보다도 가장 무난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전공과 전혀 무관한 회사에 취직해서 매일 그만둔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회사원. 거기다 안정적으로 대접받고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단지 그 이유로 약대 편입을 하려고 하는 속물근성까지 갖춘 완벽한 평범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왔을 때 갑자기 정신이 들면서 한심한 이유로 시작한 편입 공부부터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결심은 거창한 것 같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그만두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저 인강 해지 버튼을 눌러 몇 푼 되지 않는 환급금을 돌려받고 펼치지도 않았던 책들을 낑낑거리며 헌책방에 가져가서 몇 천 원을 받는 것으로 끝이었다. 매입하지 않는다는 책들을 버려달라고 말하고 다시 찾아갈 수 없다는 직원의 말에 안심에 가까운 감정으로 집으로 돌아오다 B는 자주 다니던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한참을 고만고만한 골목길을 헤매다가 겨우 큰 도로변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다니는 큰길. 아마 그 날 이후로 B는 이 모임에 매번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 드디어 왔네. 왜 이렇게 늦었어?” 지각이론을 만든 친구가 A를 반겼다. A는 주말 저녁 번화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피곤한 몰골로 등장했다. “약국에 엄청난 진상이 와서 처리하느라 늦었어.”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고 서로의 근황을 묻다 보니 자연스럽게 A는 그 진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여자가 약을 버려달라고 약국으로 왔는데 A의 약국에서 약을 사지도 않은 것 같았고 약이 너무 많아서 처리해주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알약은 종량제 봉투에 버려도 되는 걸로 법이 바뀌었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약을 받아 들었는데 그 여자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름이 뭐냐는 둥 보건소에 신고를 하겠다, 어느 학교를 나왔냐고 그런 학교 나와서 이런 약국이나 하면서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와서 직장을 몇 년 다닌 줄 아냐며 악을 쓰고 인신공격을 했다고 했다. 친구들은 사이사이에 끼어들며 이름을 왜 묻는 거냐 그냥 약 받아주지 그랬냐 저마다의 의견을 말했다. B는 말하는 사람의 입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떠오르는 형편없는 생각들을 떨치려고 애쓰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A가 딱하다거나 그 여자가 황당하고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솔직한 심정은 정반대였다. B는 약사도 고달픈 직업이라고 생각하다가 순간 스스로가 이솝우화의 여우같이 느껴져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표정을 가리려고 소주를 살짝 마셨다. B는 아마 다음 모임이 있을 때쯤에 아플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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