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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아리 Nov 02. 2022

평대모살코지만의 거리 (2)

오래된 제주도 여행기

언젠가부터 자기답게 사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큰 부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좋은 회사를 다니거나 돈이 많거나 예쁘거나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에 잘 개의치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첫날 평대모살코지 마루에 누워 곳곳에 걸린 그림들을 봤다. 형태가 없고 느낌과 감정만 있는 추상화가 언뜻 보기에도 4점이 넘게 보였다. 왜인지 모두 언니가 직접 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물었더니  맞다고 했다. 방 안에 들어가면 더 많은 그림들이 있었고 화장실 곳곳에도 크고 작은 그림들이 놓여 있었다. 언니가 모살코지와 어울리는 그림들을 그린 건지 모살코지가 그림들에 어울리게 변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그림들은 모두 언니를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집과 그림과 언니가 참 잘 어울렸다. 집을 봐도 언니 같고, 언니를 봐도 집 같고, 그림을 봐도 언니 같을 정도였다. 실제로 100년 이상된 모살코지의 곳곳을 언니가 직접 손보고 고치고 꾸몄으니 모살코지가 언니를 닮아갔다는 표현도 맞을 것 같다.



예스럽고 시골스러운 집만 있을 것 같은 제주도에서 시골집을 찾는 건 서울에서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최소 1년, 최대는 3년까지 시골집을 얻기 위해 기약 없이 기다리기만 한 사람들도 많았다. 언니도 게스트하우스를 열 만한 시골집을 찾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고 한다. 우연히 모살코지가 빈집이 되었고 계획에도 없던 '평대'라는 동네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인집 할머니는 언니를 유독 예뻐했다. 마음껏 집을 꾸미게끔 허락해주었고 도배 일과 건축 일을 했던 경험을 살려 집안 곳곳을 직접 손보기 시작했다. 화장실도 없던 안채에 4칸의 화장실이 생기고 두 개의 세면대가 생기고 거울이 걸리고 그림이 걸리기까지 또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직접 만든 선반, 2층 침대, 테이블까지 놓이기까지 또 6개월 정도. 1년이면 집이 언니를 닮아가기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풀이 무성한 마당과 기둥이 낡은 기와집의 원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굳이 돈과 시간을 내어 찾아오기까지 수많은 포기와 체념을 거쳤을 모살코지는 이제 담담했다. 누군가 자신을 조금 싫어해도 개의치 않고 굳이 오는 사람은 마다하지 않고 품어주는 유유함까지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담담함이 언니와 가장 닮은 점이라는 사실을 알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니는 다음날 조식으로 자두 카레를 만들어주었다. 황토색 카레 위에 새끼손톱만 한 붉은빛 꽃을 얹어주었는데 그 꽃에서 카레 색에 묻힌 자두가 다시 곧 피어날 것만 같았다. 한 숟갈을 떠먹으니 짙은 카레향과 자두의 새콤한 향이 같이 배어 나왔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 조화롭게 맛을 잘 살렸냐고 물었고 언니는 '그래? 맛있어~?'라고 특유의 상냥한 말과 함께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카레뿐 아니라 대낮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창고의 모살코지 카페도 노란 조명 아래 푸른색 그림들이 곧 바다가 되어 바닥을 찰랑일 것처럼 놓여 있었다. 붉은색 그림은 곧 노을처럼 카페를 물들일 것 같고 동네 아이들의 그림 속 사람은 아무도 없을 때마다 카페를 뛰어다닐 것 같았다.


그런 모살코지 카페에 들어가면 꼭 다른 세상에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먼 세계에 도착한 느낌. 나는 그곳에 앉아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했다. 내가 여태 만나왔던 사람과는 또 다른 사람인데 우리 둘의 마음이 잘 맞을까, 라는 생각. 실제로 아침 식사 자리에서 시를 읽어주는 언니를 보면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었다. 어딘가 오글거리고 극히 낭만적인 이 상황에 몸 둘 바를 모를 때 함께 앉아 있던 영아 언니는 카메라를 들어 언니를 찍었다. 영아 언니가 든 카메라 화면을 통해 보이는 언니의 얼굴은 무척 사랑스러웠다. 나도 영아 언니를 따라 카메라를 들었고 흉내 내어 찍은 영상이었지만 여행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꺼내어 보는 소중한 영상이 되었다. 아무튼 그곳에는 그런 조화가 있었다. 조금 민망한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품어지게 되는 묘한 조화. 그때부터 밤마다 나의 이야기도 서슴없이 꺼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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