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XSW 행사 일환으로 열린 한국 가수 공연을 관람…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다운타운의 공연장까지 가긴 갔지요. 하지만 실제 표를 끊고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말입니다.
앗, SXSW에 대해서 생소하시다구요?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 (South by Southwest)의 약자로, 매년 3월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개최되는 거대 이벤트입니다(사진 1). 저도 이 도시에 오기 전에는 이름만 들었지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니 규모가 방대합니다. 1987년 음악페스티발로 출발한 이 행사는 한마디로 음악, 영화, 인터렉티브 등이 통섭(convergence)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엔터테인먼트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매년 오스틴 경제에 1억 달러가 훨씬 넘는 수익을 선물합니다.
인터렉티브, 영화, 음악 페스티발 순서로 날짜가 맞물리며 이어집니다. 이외에도 IT, 게임, 교육, 의료기술 산업과 관련된 다양한 마케팅 활동과 각종 세미나가 개최되었습니다.
하지만 라이브 음악의 수도(live music capital)로 불리는 오스틴답게 SXSW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역시 음악 페스티발입니다. 뮤지션들 외에도 세계 60개국 이상에서 3만명이 넘는 음악관계자들이 운집합니다.
총 엿새 동안 2,000회가 넘는 공연이 다운타운에 산재한 100개 이상 나이트클럽과 바에서 펼쳐집니다. 주최국인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온 유명가수 수 백 명이 쉬지 않고 동시다발 공연을 하는 거지요. SXSW가 세계 최고 수준의 뮤직이벤트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딱 봐도 젊은이를 위한 행사입니다. 근데 나이 쉰을 넘긴 남자가 왜 거길 다녀왔냐구요? 그저께 오스틴 지역신문을 훑어보다 눈길이 멈췄기 때문입니다. 오스틴 크로니클 80페이지에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가수 <현아>의 얼굴이 떡하니 올라있는 것이었습니다(사진 2). 반가워서 얼른 기사를 읽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화요일 저녁 7시 반부터 6번가와 7번가 사이에 있는 나이트클럽 엘리시움(Elysium)에서 케이팝 공연이 열린다는 겁니다.
공연 이름은 <케이팝 나이트 아웃, K-POP Night Out>. 출연가수는 현아, 박재범(미국 이름이 Jay Park인걸 처음 알았습니다), 크라잉넛, 장기하와 얼굴들, 이디오테잎, 할로우잰, 넬, 잠비나이 등 총 14팀입니다. 그 중 현아의 사진이 신문에 실린 건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에 그녀가 출연한 덕분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싸이의 이 노래가 얼마나 인기인지는 미국 와서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남 캘리포니아 여행을 다녀오던 길이었지요. 그곳에서 텍사스로 향하는 최남단 10번 인터스테이트 고속도로는 멕시코 국경을 따라 주욱 이어지는데요. 그 중간 중간에 불법입국자를 체크하기 위한 검문소가 있습니다. 저도 검문을 받았습니다. 깜빡 여권을 빠트리고 여행을 떠난 바람에 꼬치꼬치 질문이 이어지더군요.
“미국 시민이냐? -> 아니다-> 어디서 왔냐?-> 한국에서 왔다-> 왜 여권이 없냐?-> 여행 올 때 못 챙겼다 -> 직업은? -> 대학교수다….” 소총을 어깨에 둘러매고 고개 갸웃거리는 국경경비대원. 선글라스 너머 눈동자가 뭔가 의심스러운 빛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수염 기른 제 모습이 어딘가 멕시칸 같아서 그랬던 걸까요?
쉽게 통과시켜 줄 기미가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습니다. “너 싸이 아냐?-> 알지 ‘갱냄 스타일’ 불렀잖아. -> 그래 맞아, 그 싸이의 나라가 내가 사는 나라야 -> 오오 그러냐?!” 그러고는 운전석에서 싸이의 말춤을 시연(試演)해 보여 줬습니다. 경비대원이 화답해서 자기도 투다닥 투다닥 군화발로 말춤을 추더군요. 뭔가 서로 통한 거지요? 그러더니 활짝 웃으며 “오케이, 좋은 여행해라” 하며 통과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는 문화의 위력을 실감한 순간이었지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작년에도 역시 같은 장소에서 케이팝 공연이 열렸답니다. 입장권을 현장에서 팔았는데, 공연 시작 4시간 전부터 관객들이 줄을 섰다고 하네요. 미국에서 한국 팝(K-Pop) 인기가 높다는 건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싸이만 유명한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노래와 춤의 인기는 저변이 훨씬 넓고 깊습니다. 그걸 처음 경험한 건 지난주 방문한 텍사스 주립대에서였습니다. 1년 동안 적(籍)을 두게 될 이 대학 매스커뮤니케이션학부의 책임자는 주디 오스캠 교수. 수인사를 나누자 말자 자기 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겁니다. 자식이 둘이고 모두 중국에서 입양한 딸이랍니다. 그 중 방년 15세의 큰 딸이 케이팝의 완전 광팬이라고.
한국에 직접 가서 ‘SM 엔터테인먼트’ 방문하는 게 꿈이라는 이 소녀.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한국 노래만 흥얼거린다는군요. 오스캠 교수에게 그러면 한국 가수 누구 아는 사람이 있냐 물어봤습니다. 샤이니, 빅뱅, ‘통방씬퀴’… 줄줄 뀁니다. 딸내미가 하도 좋아하니 자기도 절로 가수 이름을 외웠다는 겁니다.
이처럼 유명짜한 우리 가수들이 이국 하늘 아래에서 노래를 부른다니! 하지만 표 얻기 위해 4시간 동안 줄을 설 엄두가 도저히 안 납니다. 공연 관람은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 가수들이 대체 얼마나 인기가 높은지 눈으로 한번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낮에는 동네 공공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다 저녁에 다운타운으로 차를 몰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텍사스에서는 3월 9일부터 섬머타임이 시작되어 시간이 한 시간 앞으로 당겨졌습니다. 7시인데도 아직 사방이 훤합니다. 예상대로 중심가는 엄청난 교통정체를 보입니다. 수십 개의 공연이 동시에 열리는 6번가 근처는 더하군요. 경찰차들이 여러 대 도로를 완전히 막아놓고 차량을 통제중입니다. 근처의 공영주차장을 몇 바퀴나 뱅뱅 돌아도 자리가 없습니다. 축제 기간 중에 임시로 문을 연 사설 주차장은 완전 바가지 요금, 시간 당 15달러 이상을 요구합니다. 하는 수 없이 중심가에서 훌쩍 떨어진 어느 교회 옆에 차를 세웠습니다.
10분 정도 걸어 내려오는데 다운타운 일대가 완연 축제 분위기로 들썩입니다. 청년들이 곳곳에 모여 앉아 왁자지껄 대화 나눕니다. 공연을 기다리며 즉석 핫도그로 저녁을 대신하는 사람도 많군요(사진 3). 엘리시움 나이트클럽은 허름하기 짝이 없는 건물. 나지막한 단층 건물 주위를 낡아빠진 검정색 양철판으로 둘렀습니다. 하지만 공연장이 한심하다고 실망할 일은 없습니다. 음악도시 오스틴의 클럽들은 꾸며놓은 게 모두 고만고만하니 말입니다.
나이트클럽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 채 입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못 돼도 줄이 200미터는 넘어 보이는군요. 가슴팍에 커다랗게 “대한민국”이란 한글을 새기고 그 위에 태극기까지 그려진 티셔츠 입은 백인 여학생이 유난히 눈길을 끕니다. 100퍼센트 케이팝 매니아라고 봐야겠지요? 오늘은 일대의 다른 클럽들에서도 많은 유명가수들이 공연을 한답니다. 그런데도 엘리시움의 입장 대기자 숫자가 압도적이라 할 만큼 확실히 더 많습니다.
방송용 카메라가 분주히 오가는 중에 언뜻 훑어보니, 동양계 청년과 아가씨들이 전체의 3분의 1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라틴계, 흑인, 백인들입니다(사진 4). 솔직히 고백하건데, 저는 오늘 출연하는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거의 모릅니다. 아는 건 딱 하나 노래방에서 따라 불러본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뿐. 그래도 텍사스 한 구석에서 한국 바람이 이렇게 거센 걸 보니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어제 읽은 오스틴 지역신문은 현지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더군요. “한반도에서 밀려오는 음악 쓰나미(musical tsunami)”.
백범 김구선생은 1947년에 쓴 <나의 소원>에서 이렇게 소망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특정 국가의 문화, 예술, 교육, 기술이 지닌 총체적 능력을 뜻하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 개념을 70여년이나 앞서 갈파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몇몇 댄스음악과 드라마가 일시적 인기를 끌 뿐 한국문화가 미치는 세계적 영향력이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한류(韓流)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그 같은 제한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유럽문화 특히 마네, 모네, 반 고호, 폴 고갱 등 19세기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미친 우키요에(浮世繪 : 일본 에도시대의 풍속화)의 영향력은 널리 알려진 사실. 이후 150년에 걸쳐 일본문화는 질과 양에서 서구 사회에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값비싼 요리로 자리 잡은 일식(日食)에서부터 엄청난 매니아층을 보유한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요즘은 중국이 더 무섭습니다. 자국어와 문화의 세계적 확산을 위해 매우 공격적 활동을 펼치고 있지요.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 공자학원(孔子學院)입니다. 무려 134개 국가에 500개 넘게 설립된 이 교육문화기관은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는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진핑 정부가 내세운 <중국의 꿈> 정책의 마지막 완성 단계가 바로 미술, 영화, 미디어, 스포츠 등 소프트파워의 확산일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한국어 교육을 위해 세종학당(世宗學堂)이 여러 나라에 개설되어 있지만, 실천의 적극성과 체계성에서 공자학원에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한식 세계화? 이건 수백 억 원의 혈세를 허공중에 흩뿌린 한류 확산의 대실패 사례지요.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는 어떻습니까. 쉴 새 없이 되풀이되는 대통령의 외유행각에 예술가나 작가가 수행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정부나 민간 모두 문화가 지닌 힘에 대한 인식이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증거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이 같은 한계를 십분 인정한다 해도 (저의 경우) 외국에 나가서 우리 영화나 음악을 접할 때의 느낌은 어떤 본질적 기쁨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런 순간마다 마음속에서 “이정도만 해도 어디냐”라는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곤 합니다. 10여년 전 프라하 공항에 내려 시내로 향할 때, 도로 옆 가로등에서 일제히 펄럭이는 “삼성전자 깃발”을 발견했을 때의 자부심과도 일맥상통하는(제가 삼성을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닌 줄 아시죠?^^).
어이쿠, 사설이 길어졌네요. 드디어 저녁 7시 반,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혹시나 싶어 입장 대기 줄 끝에 붙어 이삼십 분 정도를 기다려봅니다. 하지만 줄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네요(공연장에서 한 사람이 빠져나가면 한 사람을 들여보내는 방식이라 그렇습니다). 끝내 미국 땅에서 우리 가수들 노래 라이브로 들어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가 봅니다(공연 시작 한 시간 반이 지나 다시 나이트클럽을 지나왔는데 그때까지도 입장 못하고 기다리는 팬들이 50미터 넘게 줄을 서있더군요).
거리 곳곳의 바와 나이트클럽에서 신나는 연주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가득 찬 도로 위에 전자악기와 드럼 소리가 파도처럼 거세게 일렁입니다. 교차로에는 대목을 노리고 관광객 기다리는 인력거 청년들이 여러 명 대기 중. 사진 찍어도 되냐 물으니 웃으며 흔쾌히 허락해줍니다(사진 5).
이대로 집으로 가기는 아쉽습니다. 멀리 네온사인을 밝힌 데킬라 바가 보입니다. 멕시코 농민혁명의 풍운아 판초 비야의 여인일까요, 탄대(彈帶)만 걸친 채 농염하기 짝이 없는 멕시코 아가씨 그림. 그 밑에서 데킬라는 안 마시고 맥주 한 모금만 마셨습니다(사진 6).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 차 세워놓은 곳으로 갑니다. 3, 40미터 간격으로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진 이면도로는 좀 무섭습니다.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교회 옆길. 차의 시동을 거는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까닥까닥 손가락짓으로 저를 부릅니다. 키가 족히 180센티미터는 될 것 같은 헤비급 체구의 흑인 아주머니. 다가가서 차창을 내리니 하이톤의의 잔소리가 다다다다 시작됩니다.
“여기는 교회 건물에 속하는 땅이야. 차를 그냥 세워놓는 데가 아니라고…. 그래도 굳이 주차를 하려면 주님을 위해 기부금을 내는 게 좋아….” 신분도 확실치 않은 사람에게 주차비 명목의 돈을 내기가 그래서, 혹시 다음에 오면 내겠다 하니 말이 더욱 길어집니다. 고요히 입을 다물고 경청할 수밖에(무려 5분 동안이나). 다음번에는 꼭 예배를 보고 헌금 20달러를 내라고 합니다. 예스 맴! 화답을 하고 겨우 풀려나옵니다. 말끝을 길게 끄는 특유의 텍사스 사투리 탓에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정말 훌륭한 설교 말씀이었습니다^^.
산들산들 봄바람이 서 너 살 꼬마들처럼 온 하늘을 뛰어다니는 텍사스의 저녁.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나저나 현아는 오늘도 그 섹시한 허리춤으로 미국인 팬들을 휘어잡았겠지요?
추신1) 잠자리에 들 무렵인 새벽 0시 20분. 세계적 팝스타 레이디가가가 예고 없이 박재범 공연을 보러 엘리시움을 방문한 모양입니다. 뜻하지 않은 거물을 만난 관객들이 폭풍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 공연장 분위기가 완전 폭발했다고 합니다. 레이디가가가 박재범 팬이라는 건 관계자들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 하더군요. 만에 하나 기회가 닿았다면 바로 옆에서 케이팝 리듬에 신나게 몸을 흔드는, 평범한 복장과 메이크업의 레이디가가를 구경하는 진기한 경험을 할 뻔 했습니다.
추신2) 레이디가가가 공연장에 입장한 10분 후. 제가 걸어갔던 바로 그 길에서 초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사진 7, 8. 출처 pitchfork.com & abcnews.go.com) 라샤드 오웬스라는 만취 운전자가 훔친 차를 몰고 도로폐쇄 바리케이트를 부순 다음 군중들을 덮친 겁니다. 공연이 진행 중이던 “모호크 바” 앞에 모여 늦은 밤까지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을 향해. 네덜란드에서 온 관광객 1명을 포함해 무려 4명이 목숨을 잃고 25명이 다친 참사였습니다. 분위기에 취해서 저도 그 현장에 남아있었을 수 있다 생각하니 뒤늦게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오스틴의 밤이었습니다.
The scene at SXSW in Austin, TX were 2 people died and dozens more were injured after a hit and run. (Colin Kerrig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