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5일에 열린 청룡영화상을 통해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 있다. 영화 ‘범죄도시’에 출연하여 남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진선규였다. 대학로 연기파 배우로 알려진 그는 ‘택시운전사’의 유해진과, ‘불한당’의 김희원 등을 포함한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올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20년이라는 오랜 무명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감동적인 수상 소감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배우 진선규처럼 긴 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주변 환경이 넉넉하거나 기댈 곳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인 어려움 없이 자신의 꿈을 만들어 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많은 사람들은 의지의 박약이 아닌, 먹고살아야 하는 지극히 원초적인 고민 때문에 꿈을 접기도 한다.
유학시절 함께 공부했던 한 후배는 유학생 한 명의 2-3년 치 생활비에 맞먹을만한 고가의 차를 몰고 다녔다. 그는 학업을 마친 후 한국으로 귀국했고 결국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꽤 괜찮은 직장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고 싶은 길을 찾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인 그는 전폭적인 가족들의 지원을 힘입어 꿈을 이뤄가고 있는 셈이다.
오랜 무명 생활을 거쳐 주목을 받게 된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진선규 역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부서진 휴대폰을 테이프로 고정해 사용했고, 극단 생활을 하는 동안 아르바이트로 배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현실적인 이유로 같은 배우의 길을 가던 그의 아내는 꿈을 잠시 접어야만 했다.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 따낸 배역이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니 본인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 없는 배경 역할을 하거나, 손과 목소리만 나오게 된 경우도 있었다. ‘범죄도시’를 연출한 감독은 1,200명의 배역과 보조 출연자 모두를 오디션으로 선발했고, 얼마나 절실함이 보이는가로 평가했다고 밝혔다. 진선규의 역량과 절실함은 감독의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했다.
공교롭게도 며칠 전 접했던 짤막한 강연 동영상의 주인공이 바로 ‘범죄도시’의 강윤성 감독이었다. 그는 흰머리가 제법 보이는 중년의 모습이었다. 많이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 작품이 강 감독의 입봉작이었다. 그는 지난 17년의 세월을 어떻게 극복해왔는지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소원은 영화 한 편을 찍어보는 것이었다. 첫 10년은 즐겁게 기다리며 시나리오 작업을 할 수 있었으나 그다음부터는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고 속내를 밝혔다. 생계를 위해 그의 아내는 작은 신발 가계를 시작했고 강 감독은 그 일을 도우며 짬짬이 글을 썼다. 기회가 생기는대로 방송일, 영화 연출부, 홍보영상 제작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일이 진행되나 싶다가도 투자자 때문에 난항에 빠지기도 했고 촬영 직전 제작이 무산되는 일도 이어졌다. 그 사이 빚도 늘어났다. 결국 그는 영화를 포기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무작정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러나 여행 도중 투자자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첫 작품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그야말로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이야기였다.
강 감독이 강연 말미에 내린 결론에는 의외의 반전이 있었다. 인생 이야기를 한쪽에서만 찾지 말고 다른 곳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본인처럼 미련하게 하나만 열심히 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가 그런 고집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되, 지치고 힘들면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이야기였다. 그 안에서 새로운 조력자와 스승과 관계들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어차피 삶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일 테니. 마치 영화처럼...
강 감독의 제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의 여정을 들으며, 각자의 시간표에 따라 꿈을 좇는 수많은 음악가 친구들의 모습들이 스쳐갔다. 언제 어떻게 펼쳐질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동료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