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산장에서 외국인들과 얘기하다보면, 네팔과 부처에 대한 말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부처를 인도인이라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나도 어렸을 때, 부처를 인도인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나긴 한다. 그래서인가, 사실 외국인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부처를 인도 사람으로 여기는 거 같다.
별 생각없이 이렇게 정정해주고 계속 우리의 얘기를 이어가려는데, 옆에서 듣던 네팔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해주었다.
응?, 이라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 말에 대한 네팔사람들의 반응을 본 이후부터는
'부처는 네팔에서 태어났다!' 라고 더욱 폼나게 몇 번이나 외쳐대곤 했다.
하지만 네팔사람들의 이런 자부심과는 달리 인구의 87%가 힌두교이며, 불교는 고작 8%뿐이다.
한발 더 나아가 부처가 태어난 중부 도시 '룸비니' 주민들은 네팔 불교신자의 평균치 보다도 낮다. 힌두교는 당연하고 이슬람교보다도 신자가 적다.
그렇다고 네팔사람들이 부처를 등한시하는 건 아니다. 좋아하고 존경한다. 부처가 네팔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도 강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부처를 힌두교와 연관시켜,
힌두교의 신 '비슈뉴'의 아홉 번째 화신이라 여긴다.
간단히 말해 부처를 힌두교의 여러 신 중 하나라 여긴다는 것이다.
(반대로 불교 측에서는 앞서 말한 '비슈뉴' 뿐 아니라 힌두교를 대표하는 나머지 3대신인 '브라흐마', '시바' 까지 모두 부처에 귀의했다고 말한다.)
네팔의 분위기가 이러다 보니 네팔을 여행하며 본 불교 건축물이란 히말라야를 오르며 본 티벳 불교사원과 네팔 정부의 건의로 UN과 함께 조성한 룸비니국제사원지구가 유이했다.
1. 티벳
티벳은 네팔과 함께 히말라야를 접하고 있다. 그래서 불심으로 가득한 티벳의 불교사원이 오히려 부처가 태어난 네팔쪽 히말라야 곳곳에 있다.
2. 룸비니국제사원지구
부처가 태어났다고 추정되는 표지석이 룸비니(네팔의 중부도시)에서 발견됐다. 그래서 네팔 정부가 UN에 건의해 현재는 여러 국가의 사원들이 이곳에 들어선 상태다.
그만큼 네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힌두교를 믿었고 그들의 숭배 대상인 소를, 특히 암소를 귀히 여겼다.
(암소는 다섯가지나 되는 생산물을 준다. - 우유, 요거트, 버터, 똥, 오줌)
차가 그렇게 달리는 도로에서도 소만 나타나면 누구도 뭐라 않고 알아서 피해준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 개 팔자는 명함도 못 내민다.
"만약 차로 소를 치여 죽이면 어떻게 해요?"
"그건 살인죄와 똑같아."
"진짜요? 그럼 깜깜한 밤에 실수로 그러면요?"
"그건 어느 정도 선처되겠지만 아무튼 종교를 넘어 법적으로도 큰 문제야."
칠복이 아저씨는 진지한 어투로 설명과 주의를 이어갔다.
"그러니까 길가의 소를 때리거나 상해를 입히면 절대 안 돼, 알았지?"
가끔 달리다보면 '무슨 똥배짱으로 저리 편하게 엎어져 있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결국엔 순순히 '소'님을 피해 달렸다. 그런데 힘들게 달리다가 이런 일을 겪으면 좀 피곤하다. 어쩌다 한두 번이거나, 기분이 좋으면 몰라도, 좀 짜증이 나있을 때는 억하심정으로 한대 쥐어 박고 싶은 마음도 있다. 물론 그래봤자 소를 향해 투덜대는 게 고작이다. 그것도 주위 눈치 봐가면서 말이다.
"아저씨,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이거 뭐에요?"
네팔에 오자마자 접한 음식은 '모모' 라는 네팔식 만두였다.(정확히는 티벳식 만두다.) 그런데 매번 그것을 먹을 때면 너무나 딱딱한 흰색의 무언가가 나와 결국 그것들을 뱉어가며 조심스레 씹어야 했다. 그래서 마침 아저씨와 '모모'를 먹다말고 불현듯 이렇게 물은 것이다.
"아~ 그거, 저거야."
칠복이 아저씨가 태연히 가리킨 곳에는 분명 소가 있었다.
"네? 무슨 말이에요, 설마 소를 먹는다고요?"
"그거 저 동물의 뼈야. 그리고 저거 소 아냐, 버팔로(물소)야."
'버팔로? 버팔로나 소나 똑같은 거 아니에요???'
그랬다. 네팔 사람들의 범주에선 큰 뿔을 가진 물소는, 결코 소가 아니었다.
'둘 다 똑같은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네팔에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차츰 느꼈지만 호랑이와 사자가 다르듯, 네팔에서 이것은 생물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완전 별개의 존재이다.
이 후로 나도 두 동물을 달리 보려했지만 위 사진과 달리 실제로는 분간이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왜냐면 버팔로라고 해서 무조건 검은색만을 띄는 게 아니라 누런색도 있고 간혹 뿔이나 덩치까지 작은 녀석도 있어서 나로선 도저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네팔 친구들이 장난친다고 소인지 버팔로인지로 날 시험할 때면 여지없이 틀리고는 '왜 이렇게 어려워',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야만 했다.
그러다 이번 자전거 여행을 끝내고 볼일이 있어 어릴 때 갔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다시 찾았다. 십 년도 더 전에 왔던 이곳이 내게는 의미가 있어, 평소와 달리 유적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앙코르와트의 회랑부조를 보다, 마침 숙소에서 가져온 해설집을 펼쳐드는데,
'다른 세력이 힌두교를 욕보이기 위해, 그들의 숭배대상인 물소를 죽이는 부조입니다.'
'응? 힌두교는 물소 숭배 안 하는데? 오히려 축제 때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데???'
내가 네팔에서 보고 들은 게 틀리지 않았다면 이 책의 해설은 잘못 된 게 틀림없었다.
내가 만약 소와 물소의 차이를 몰랐다면
예전처럼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까?
이 하나만으로도 앙코르와트를 다시 찾은 보람과 함께 이번 자전거여행에 대한 보람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안전한 네팔
"그 위험한 곳에 왜 가?"
"왜요?"
거기 지진 났었잖아
내가 여행을 떠나기 일 년 전쯤, 네팔에서 큰 지진이 있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네팔로 향하는 내게 이런 말들을 종종 걸어왔다. 하지만 우습게도 당사자인 난, 아무것도 몰라 오히려 덤덤하기만 했다. 지진의 규모가 어땠는지, 그에 따른 피해가 어땠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세상에는 워낙 많은 일들이 일어나니까 그저 어느 작은 마을에 불어닥친, 어디에나 있을 불행이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별 걱정없이, 그렇게 훌쩍 떠났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불행은 내게, 여러 해외토픽 중 하나였을 뿐이다.
또한 앞서 히말라야 트레킹 이야기에서도 밝혔듯이, 난 정말 아무 것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그곳으로 갔다. 알아본 것이라곤 단 하나, 안나푸르나를 오를 때, 높아질수록 기온이 떨어진다는 기본적인 상식 정도였다.
"이거 봐, 여기 다 보수 중이야."
"지진이 이곳에도 있었어요?"
"이곳 카트만두부터 저 멀리 에베레스트에도 있었어."
카트만두에서 에베레스트까지는
직선거리 만 해도 무려 200km다
나는 부서진 채 그대로인 도로를 매일처럼 달렸고, 보수공사 중인 유적을 만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진으로 보수 중인 유적
부서진 도로를 피해 달리거나 그마저도 안 될 땐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교통이 원할하지 않을 때면 트럭들의 모래먼지가 나를 순식간에 덮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 지진활동에 대한 불안함은 전혀 없었다.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불편함이지, 결코 위협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진'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은 여행자들에게 꽤 컸나보다. 그것은 고스란히 네팔 경제에까지 이어져 큰 타격으로 확산됐다.
무너진 사원의 원숭이 한 마리
"네팔 사람들은 제게 많은 것을 주었어요, 어떻게 하면 제가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네팔 여행을 마치고 출발지였던 카트만두로 돌아온 나는, 한국식당을 운영하는 현지인, 길리안 아저씨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팔에서 지진이 난 이후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어. 지진이 그친지도 꽤 됐는데 말이야. 자전거로 네팔을 달린 너도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 괜찮지 않을까? 네팔이 안전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줘, 그거면 충분해."
네팔의 경제는 제조업이 발달하지 않았다.(그마저도 맥주나 설탕, 담배같은 것이다.)
그래서 해외로 나간 네팔근로자들이 국내로 보내는 월급과, 비효율적이지만 그래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 농업, 거기다 히말라야 등으로 가능한 관광업이 네팔경제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진으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안 그래도 재난 때문에 정신없는 주민들에게 더 큰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길리안 아저씨가 내게 저리 말한 것이다. 실제로 나는 길리안 아저씨 가게에 며칠 신세지며 그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카트만두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알려진 이 한국식당에 오는 손님은 너무 적었다. 하루에 채 몇 팀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 여행자뿐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다들 비슷했다
아저씨와 얘기를 나눈 뒤, 처음 네팔에서 묵었던 한인숙소로 페달을 밟았다. 그곳은 복잡한 카트만두의 도심 속에서도 평온하게 고요를 유지한 매력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네팔여행을 한 사이 사라져있었다. 폐업을 한 건지, 이사를 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괜스레 '악화된 경제 때문은 아닐까?' 하는 짐작으로 허물어진 그 숙소의 파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당 한 가득 차지한 대나무들은 모두 다 부서져있었다. 아마 아저씨와 나눈 얘기 탓에 더 그랬겠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저만큼 무거워져 있었다. 이제야 실제로 느꼈다는 뒤늦은 회한과 함께 말이다.
어떻게 그들은 매번 나를 보고 웃을 수 있었을까? 정말 단 한번도 내게 화를 내거나 안 좋은 소리를 한 사람이 없었다.
난 천천히 더미들 사이에 앉아 '어찌하면 내가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그곳을 조용히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