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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경 딸 Mar 03. 2021

울 엄마 꿈은 영웅이 장모님

  어느 채널을 돌리든 트로트가 흘러나오는 요즈음, 최고 수혜자는 우리 엄마가 아닐까 싶다. 어떤 이들은 과열된 트로트 시장에 난색을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 혜경 씨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트로트 열풍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의 열혈 시청자였던 엄마는, 같은 출연자들이 등장하는 '뽕 따러 가세'나 '뽕숭아 학당'같은 프로그램도 꼬박꼬박 챙겨보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출연진 중 엄마의 '최애'는 트로트계 슈퍼스타, 임영웅 씨이다. 사실 어느 방송사의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임영웅만 떴다 하면 돌리던 청소기도 내려놓고 끓어 넘치는 찌개 불도 꺼버리고 채널 고정이다.


  처음에 나는 멋모르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더란다.

- 엥? 쟤가 뭐가 좋아! 입술도 두껍고 촌스럽게 생겼구만.

  딸의 망언을 잠자코 듣고 있을 엄마가 아니었다. 영웅 씨를 변호하는 그 순간만큼은, 대형 로펌 저리 가라다. 내가 영웅 씨의 단점을 한 개 이야기하면, 혜경 씨는 영웅 씨의 장점 네다섯 개를 꺼내야 대화가 끝나는 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엄마와 통화를 하다 전화를 급히 끊게 되곤 했었는데,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지만 이제는 안 봐도 비디오다. 듣는 둥 마는 둥 '어, 그래 그래.' 하는 시큰둥한 대답이 두어 번 이어졌다면 '음, 그래. 어디선가 또 영웅 씨가 나오고 있군'이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레 전화를 끊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의 영웅이 예찬론은 끝이 없다. 얼마 전에 어떤 브랜드의 등산복을 입고 나왔는데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부터 시작해서 애절한 가족사까지. 시집가는 봄처녀처럼 들뜬 말투이기에 끊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지겹다기보다는 나 역시 엄마의 임영웅 예찬론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루하루가 바쁘고 삶이 팍팍해, 먹고사는 문제 이외의 다른 것들에 몰입하기 어려운 것이 아마 많은 엄마들의 일상일 테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테지만, 적어도 내가 보고 살아온 엄마의 인생은 그러했다. 당장 내일까지 내야 할 아이의 학원비, 이번 주 안에 내야 할 공과금, 이번 달 월세.. 이런 것들이 대기표를 뽑고 줄을 서 있는데 취미며 여유 같은 녀석들과 어떻게 가까이 지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엄마는 언젠가부터 드라마도, 복잡하고 심각한 내용은 잘 보지 않게 된다고 했다. 드라마에서까지 머리 아파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같은 맥락에서, 지나치게 신파적이고 분통 터지는 드라마도 거른다고 했다. 이미 그런 일은 현실에서 심심치 않게 왕왕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렇게 현실에 치여 무엇하나 오롯이 빠져들기도 어려웠던 엄마에게, 트로트 열풍만큼 반가운 바람이 또 있었으랴.


  며칠 전에는 방에 누워 핸드폰을 하고 있는데, 엄마의 웃음소리가 벽을 뚫고 넘어오는 게 아닌가. 호호하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듯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몇 번이고 벽을 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안방에 들어가 보니 혜경 씨는 미스터 트롯 멤버들이 나오는 '사랑의 콜센터'를 보고 있었다. 방송에서 무슨 게임을 하는데, 그게 너무 우스워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참이었단다. 나도 엄마 옆자리로 이불을 비집고 들어가 누웠다. 방송은 둘째치고 옆에서 떠나가라 웃는 소리에 나까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엄마는 얼마 만에 이렇게 소리 내서 크게 웃는지 모르겠다고, 배가 아플 정도라고 했다.


  한 번은 엄마에게 물어봤더란다.


이미지 출처: 임영웅 공식 유튜브 채널


- 엄마, 잘 생각해 봐 봐.
나랑 임영웅이 있어.
근데 둘 중에 한 명이랑만 밥을 먹어야 돼.
누구를 고를래?


  물어본 내가 바보였다. 엄마는 단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영웅 씨를 선택했다. 그때는 코로나가 꽤 심각해, 경기도와 사는 나와 전라도에 사는 엄마는 거의 몇 달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나의 항변(?)에도 혜경 씨는 끝까지 본인의 선택을 고수했다. 딸은 언제라도 볼 수 있지만, 영웅이는 언제 만나보겠느냐며.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라 금세 납득해버렸다.


  그런 우리 엄마의 요즘 꿈은 영웅이 장모님이 되는 거란다. 언젠가 영웅 씨가 나오는 방송을 보다가, 지극히 효자 같은 모습에 '영웅이 엄마는 참 좋겠다.'라고 했더니 엄마는 '영웅이 엄마보다도 장모님이 더 부럽다'고 받아치는 게 아닌가!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이런 걸까? 어쨌거나 그 말이 우스워 며칠을 웃었다. 그리고 좀처럼 화장을 하지 않는 나는, 요즘 외출 준비를 할 때면 실없는 농담을 하곤 한다. '오늘은 뭐라도 좀 찍어 바르고 나가야겠수. 행여 모르지 또 영웅이라도 만날지! 우리 엄마 소원이라는데 하나 있는 딸이 노력이라도 한 번 해봐야지 않겠어? 다녀올게!' 엄마의 큭큭소리가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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