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는 고양이 같은 아이다. 처음 만나면 곁을 쉽게 내주지 않고 날카롭게 굴지만, 정이 들면 옆에 붙어 앉아 고롱고롱 소리를 내는 고양이와 닮았기 때문이다. 예지는 고양이처럼 예민하다. 이 예민함은 아토피가 70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미세먼지가 심하거나 실내 공기가 조금이라도 건조하면 예지는 눈이 새빨개져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마치 공기청정기가 빨간빛으로 점등하며 맹렬히 바람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손등과 팔 안쪽 여기저기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긁어낸 흔적들로 가득했다. 이제 막 생긴 새빨간 상처와 아물어가는 딱지와 그 딱지를 뜯어내서 흐르는 피,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남은 흉터들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두드러기를 겪는다. 간지러움이 심해지면 나도 모르게 허벅지에 손이 가고 잠결에도 긁어댄다. 간지러움은 긁을수록 더 심해져서 피가 날 때까지 벅벅 긁다가 결국에는 잠이 깨고 만다. 간지러움이라는 하찮은 이유로 잠 못 이루는 상황에 화가 치밀어 올라, 결국엔 다리를 쥐어뜯을 기세로 꼬집으며 분풀이를 한다. 약을 먹어도 약을 발라도 해결이 안 되는 그 밤은 고요했고, 나는 소란했다. 일 년에 한두 번도 이러한데, 매일 간지러움과 소란한 싸움을 벌이는 예지는 어떠할까. 비할 바가 아니다.
“선생님 저 피나요.”
“예지야, 간지러워도 긁으면 안 돼. 피투성이가 됐잖아. 바르는 약 없어?”
나는 피부과 전문의도 아니고 그저 선생님일 뿐이라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긁으면 안 돼.’ ‘가려우면 약을 바르자.’ 같은 당연한 이야기만 반복했다.
예지의 예민함은 반드시 날카롭게 날이 서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주변을 읽는 감각이 깨어있고 수많은 자극 속에서 민첩하게 정보를 짚어내기도 했다. 예지의 그런 예민함은 때로는 따스했고 때로는 친절했으며 때로는 영민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예지는 반듯하고 네모지게 접은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선생님 한 해 동안 육학년 이반을 지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덕에 이번 한 해가 행복했다랄까요. (...) 전 선생님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어요. 선생님은 기분이 태도로 바뀌지 않은 분이세요. 전 제 생을 살면서 기분이 태도로 바뀌지 않은 분은 처음 보는 거 같아요. 저 또한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 24년도에도 저희에게 늘 그러셨듯이 또 다른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어 잊지 못할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주세요.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고(하시고) 스쳐 지나가는 편지뿐일진 몰라도, 선생님이 누군가에게 너무나도 감사했던 존재라는 것을 꼭 마음속 작은 한 켠에 기억해 주세요.]
스스로 배우고 느낀 것을 다른 사람의 덕으로 돌릴 줄 아는 예지는 어른스럽다. 이건 예민함을 다룰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함께해 온 날들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 수고‘하셨고’를 적었을 그 마음과, 아직 남은 시간을 뭉개지 않기 위해 수고‘하시고’를 적었을 예민함이 예쁘다. ‘하셨고’와 ‘하시고’ 사이를 여러 번 오가다 괄호를 이용해 단어를 덧붙인 섬세함이 예지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
예민하다는 ‘날카로울 예’와 ‘민첩할 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각, 행동, 재치가 날카롭고 민첩하다는 뜻이다. 고양이 같은 예지의 예민함이 기대된다.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생각을 그려 나갈지 궁금하다. 투박한 원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반짝이는 보석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처럼 예지만의 정교함으로 수많은 반짝임을 만들어내면 좋겠다.
예지는 요즘 두 팔을 한껏 벌려 내게 다가온다.
“선생님 안아주세요.”
예지를 ‘살금’ 안으면 그 아이는 나를 ‘끌어’ 안는다. 마치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그렇지만 언제나 반드시 우리는 안고 난 다음을 맞이한다. 서로에게서 떨어지는 일이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이별을 예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운함과 애정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들 속에, 시간은 차곡차곡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졸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 학생의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