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자, 우리

수업에 앞서 #2

by 워커

『밥 먹자, 우리』의 기원


『밥 먹자, 우리』. 영화 창작 프로젝트 그룹 『친구야, 영화 찍자』의 2024년도 영화 제목이다. 예측할 수 있는 정서로 흘러갈 듯한 제목이다. 나이브하다. 들여다보기에 자극이 없다. 절반쯤은 옳은 말이다. 촌스러운 느낌도 있다. 21세기의 속도감에 미치지 못한다.

실은, 생각보다 많은 아이가 아침을 먹지 못한다. 글자 그대로 밥을 먹지 못한 채 학교에 온다. 적어도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아침을 먹지 않고 공복인 채로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많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아침 먹었어?”

“아니요.”

“엥, 그러면 속이 아프고 쓰린 게 당연하지.”

“아, 원래 아침은 안 먹어요.”

습관적이면 큰 건강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있을까.

“그래. 그러면 속도 아프겠지만, 뇌를 깨울 연료가 없는 건데?”

“그래요? 할 수 없죠.”

“왜 안 먹는 건데?”

“시간이 없어요. 일어나기 힘들어서요.”

“몇 시에 자는데?”

“1시쯤?”

“그래? 그때까지 뭐 해?”

“학원 다녀오면 10시고, 숙제하다 보면 1시 넘을 때도 많아요.”

“학원 숙제?”

“학교 숙제도 있는데 학원 숙제가 많아요.”

“음, 그렇구나. 학원이 정말 중요하구나.”

“...”

“학원도 중요하지.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 해.”

“...”


아이들 처지에서도 대책이 없어 보이는 권유이기는 하다. 대안을 품고 있지 않은 비생산적인 대화다. 솔루션이 없다. 21세기에, 세계 10대(최근 들어서는 슬슬 15대 정도로 수렴되는 분위기이긴 하다.) 경제대국인데, 아이들이 굶고 있는 셈이다.

아침의 부족분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K-급식이 도움이 되긴 하겠다.

하지만, 성장기에, 아침부터 수업에 집중해야 하는 학교에서 오전을 굶은 채로 보내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은 문제적이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구조적인 맥락이 그 안에 들어있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국가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칠만한 사안이다.

양육자가 모두 일하는 경우, 배고픔은 아무래도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성평등의 문제를 떠나서 사회 경제적 구조 자체가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일해야만 가정 경제를 유지할 수 있으니,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다. 평소 양육자보다 늦게 등교한다면 굶을 가능성은 더 커질 수 있다. 스스로 생활을 잘 꾸리는 학생도 있지만, 아직은 미성숙한 어린아이들이다.

시간상 ‘아침을 먹지 못할 정도의 하루 일과’가 과연 건강할까. 성장기의 과업을 하나하나 달성해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건강한 일상일까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사회가 청소년기의 개인에게 요구하는 ‘성장의 이상형’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밥 먹자, 우리』라는 청유


“고등학교는 어디로 갈 생각이야?”

“저는 특성화고가 좋을 것 같아요.”

“가고 싶은 학교가 있니?”

“생각은 있는데 될지는 모르겠어요. 요즘은 특성화고에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경우도 많아요.”

“그럼 그럼, 당연하지. 요즘은 진짜 그래. 일하면서 대학에 가는 경우도 많거든?”

“맞아요!”


사회의 변화는 민감하게 학교로 스며 들어온다. 여전히 수월 교육은 매력적이지만, 대학이 더 이상 보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아이들도 잘 안다. 밥 먹고 사는 일은 여전히 무거운 과제다.


“아침에 너무 힘들어서 늦게 일어났어요.”

“그래? 사실 학교가 제일 쉬운데? 이제 학교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매일 일해서 자신을 스스로 먹여 살려야 하잖아?”

“악, 생각만 해도 너무 괴로워요."

아이들도 밥벌이의 지난함을, 지겨움을 잘 안다. 그 책임의 무거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밥을 먹지 않고 학교에 온다.

나에게 '밥 먹자, 우리'라는 청유는 함께 살자, 함께 숨 쉬자, 함께 아름다워지자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하루하루 지난하다 하더라도 밥 먹고 살자, 숨 쉬고 살자, 서로 나누며 살자 같은 부드러운 청유다. 결단코 서로를 해치는 폭력은 거부하며 살자 같은 청유다.


『밥 먹자, 우리』는 영화다.


밥 먹는 행위와는 무관한 영화다. 함께 먹는 행위를 마지막 장면에 담기는 하지만 『밥』은 아니다. 편의점의 컵라면, 단백질은 부족해 보이는 소시지, 영양가는 없겠지만 당도가 사악해 보이는 빵과 기름진 과자가 우리의 마지막 만찬이다.

AI가 만든 수채화풍의 애니메이션이 담기지만, 일상은 수채화 같은 모습이 아니다.

그보다는 거칠게 휘두른 페인팅 나이프의 기름진 궤적이 조금이라도 캔버스에 담기기를 바랐다.

그런 일상의 미친 속도 앞에서 과장된 목소리로 『밥 먹자, 우리』를 외치는 영화가 완성되기를 바랐다.

언어와 현상이 얼마나 동떨어진 채 서로를 기만할 수 있는지가 담기기를 바랐다.

말이 현실을 배반하더라도, 다시 그 말이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음을 은유하기를 바랐다.

영화 창작의 과정을 한 학기, 17차시의 수업으로 구성하여, 과정을 충실히 거친다면 『밥 먹자, 우리』라는 영화 한 편이 완성되고 이를 공모전에 출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과정 설계의 목표였다.


기획을 위한 고민의 과정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배우고, 영화를 찍으며 팀워크를 쌓는 과정에서 끝없이 치열하게 싸우며 배우고, 편집이 영화의 드라마투르기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체험하며 베우고, 그 수많은 과정에서 일상 속에 진로와 퇴로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는 것이 영화 창작 수업의 목표다.

2장에서는 교육과정 설계의 기본 결과물인 교수학습지도안을 싣고, 3장에 각 과정별 산출물을 담았다. 『밥 먹자, 우리』의 기획안, 시놉시스, 트리트먼트, 시나리오, 스토리보드를 모아 담았다. 우리의 영화를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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